코로나로 망해서 컵라면 먹던 30대, '비누 거품' 하나로 인생 역전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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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코로나19라는 긴 터널을 지나며 나락으로 떨어졌다가, 비누 거품 속에서 다시 희망을 쏘아 올린 한 청년의 인생 역전 드라마를 작성해 드립니다. MZ세대의 감각과 끈기로 세차장 사장님이 된 주인공의 이야기를 생생하게 담았습니다. 마스크 뒤에 감춰진 눈물, 그리고 비누 거품 안녕하세요,  여러분.  오늘은 코로나19가 할퀴고 간 상처를 딛고 일어선, 우리 주변의 청년 이야기를 들려드리려 합니다. 한때는 잘나가는 스타트업 대표를 꿈꿨으나, 바이러스라는 불가항력 앞에 모든 것을 잃고 신용불량자 직전까지 몰렸던 31세 청년 '준호' 씨의 이야기입니다.  그의 손이 거친 타이어를 만지며 어떻게 다시 빛나게 되었는지, 그 치열했던 3년의 기록을 시작합니다. 화려했던 오픈, 그리고 예고 없던 폐업 통보 2019년 겨울, 준호 씨는 부모님의 도움과 대출을 끌어모아 홍대 인근에 퓨전 요리 주점을 열었습니다.  인스타그램 감성을 자극하는 인테리어와 독특한 메뉴 덕분에 오픈 초기에는 웨이팅이 생길 정도로 장사가 잘되었습니다. "나도 이제 영 앤 리치(Young & Rich)가 될 수 있겠다" 는 꿈에 부풀어 있었죠. 하지만 그 꿈은 단 3개월 만에 산산조각이 났습니다.  코로나19가 터졌고, 사회적 거리두기가 시작되었습니다. 저녁 9시 영업 제한, 5인 이상 집합 금지. 술장사를 하는 그에게는 사형 선고나 다름없었습니다. 월세 400만 원은 고스란히 빚이 되어 쌓였고, 아르바이트생들을 내보내고 혼자 주방을 지켰지만, 하루 매출 0원을 찍는 날이 늘어갔습니다.  결국 준호 씨는 1년 만에 권리금은커녕 원상복구 비용까지 빚을 지고 가게를 폐업해야 했습니다. 한순간에 떨어진 나락, 컵라면과 배달 대행 가게를 정리하고 남은 건 1억 원이 넘는 빚과 패배감뿐이었습니다. 준호 씨는 보증금을 뺀 돈으로 신림동의 2평 남짓한 고시원으로 거처를 옮겼습니다. 한때 '사장님' 소리를 듣던 그는 이제 배달 대행 오토바이를 타는 라이...

마트에서 10만원이 사라지는 날

스토리텔링

마트에서 10만원이 사라지는 날

물가가 오르자, “얼마 안 샀는데…”라는 말이 자꾸만 입 밖으로 새어 나왔다. 새댁의 장바구니는 가벼운데, 영수증은 묵직했다.

현실 공감 신혼 살림 장보기 전쟁 따뜻한 성장

처음엔 그냥 계절이 바뀌어서 그런 줄 알았다. 겨울이 오면 귤 값이 흔들리고, 비가 많이 오면 채소가 비싸지고, 뉴스에서 기름값 이야기가 나오면 배송비가 찔끔 오르는 것쯤은 익숙했다. 그런데 어느 날부터는 “계절”로도, “일시적”이라는 말로도 설명이 안 됐다.

그날 아침, 새댁 지안은 냉장고 문을 열어 보고 잠깐 멈췄다. 투명한 칸에 남은 건 반쯤 줄어든 우유, 케첩이 눌어붙은 병, 어제 남긴 반찬통 두 개, 그리고 맨 아래 서랍에서 힘없이 구겨진 파 한 단이었다. 신혼집 냉장고는 원래 텅 비어 있어도 괜찮다고들 했다. 둘만 살면, 필요한 만큼만 사서 딱딱 맞춰 먹으면, 오히려 단정해 보인다고도 했다.

하지만 텅 비어 있는 건 단정함이 아니라 불안이 될 수 있었다. 불안은 소리 없이 쌓였다. 결혼식이 끝난 지 얼마 되지 않았는데, 축의금 정산표 옆에 관리비 고지서가 놓이고, 그 옆에 카드 명세서가 놓이고, 그 옆에 지안의 메모지가 놓였다. 메모지에는 아주 작은 글씨로 “우유, 계란, 두부, 김, 양파, 닭가슴살, 냉동만두, 오이, 당근, 사과, 밥” 같은 단어들이 적혀 있었다. 한 끼를 위해 적은 단어들이 아니라, 한 주를 버티기 위해 적은 단어들이었다.

마트 영수증과 장바구니가 놓인 주방 테이블
장바구니는 가벼운데 영수증만 자꾸 길어졌다.

지안은 외투를 걸치며 거울을 봤다. 뭔가를 ‘사러’ 나가는 얼굴이라기보다, 뭔가를 ‘결심하러’ 나가는 얼굴 같았다. 입술 안쪽을 살짝 깨물고, 휴대폰을 켜서 메모장을 다시 확인했다. 그리고 오늘의 목표를 한 줄로 적었다. “10만원 넘기지 말기.”

그 줄이 우스워 보일 만큼, 목표는 단순했다. 하지만 그 단순함이 이미 너무 멀리 달아나 있었다. ‘10만원’은 예전엔 한 번 장을 보면 “그래도 이 정도면 괜찮네” 하고 넘어갈 수 있는 금액이었다. 지금은 “이게 왜 10만원이지?”라는 질문을 남기는 금액이 됐다.

마트에 들어서자 익숙한 냄새가 지안의 코끝에 닿았다. 세제의 향과 빵 굽는 냄새, 과일의 단내, 그리고 어딘가에서 갓 튀긴 닭강정의 기름 냄새가 섞여 있었다. 지안은 카트를 잡았다가 잠깐 망설였고, 결국 손바구니를 집었다. 바구니가 더 무거워지면 스스로 멈출 수 있을 것 같아서였다.

입구 근처에 붙어 있는 전단지가 눈에 들어왔다. “특가” “행사” “1+1” 같은 글씨들이 화려했다. 지안은 그 글씨들을 믿고 싶었다. 하지만 믿음은 경험에 의해 깎였다. 특가라고 해서 정말 싸진 게 아니라는 걸, 1+1이라고 해서 꼭 이득이 아닌 경우도 있다는 걸, 지안은 이미 한 번쯤 배웠다. 그래도 전단지를 한 장 집어 들었다. ‘혹시’라는 단어는 언제나 사람을 움직이게 했다.

지안은 장보기를 “먹을 걸 사는 일”이 아니라 “살림의 방향을 정하는 일”이라고 부르기 시작했다. 같은 우유라도 어디서, 어떤 방식으로 사느냐가 한 달의 생활을 바꿨다.

첫 번째 코스는 채소 코너였다. 상추 묶음을 집어 들었을 때, 지안은 가격표를 보고 손이 잠깐 굳었다. 눈은 숫자를 읽었는데, 머리는 그 숫자를 받아들이지 못했다. ‘상추가… 이 정도였나?’ 지안은 가격표를 한 번 더 봤다. 그리고 상추를 내려놓았다. 내려놓는 손끝이 마치 “미안해”라고 말하는 것 같았다.

지안은 양파를 골랐다. 양파는 언제나 ‘필수’였다. 된장찌개에도, 볶음에도, 카레에도 들어가는 재료였다. 양파는 말이 없고, 오래가고, 어떤 요리에도 묻어들었다. 그래서 양파를 선택하는 건 효율의 상징 같았다. 그런데 양파조차 비싸졌다. 지안은 양파망을 들었다 내려놓고, 더 작은 망을 들었다가, 결국 낱개를 골라 담았다. 낱개로 담는 순간부터 장보기는 계획이 아니라 계산이 됐다.

옆에서 누군가가 말했다. “요즘 진짜 장보기 무섭죠?” 아주 가벼운 농담처럼 들리게 말했지만, 그 말에는 뼈가 있었다. 지안은 고개를 끄덕이며 웃었다. “그러게요. 저도… 얼마 안 담았는데 늘 놀라요.” 말을 하면서도 지안은 ‘얼마 안 담았는데’라는 문장이 얼마나 자주 쓰이는지, 그리고 그만큼 얼마나 자주 절망이 반복되는지 생각했다.

마트 통로에서 가격표를 바라보는 사람들의 뒷모습
가격표 앞에서 멈춰 서는 시간이 늘어났다.

육류 코너는 지안에게 늘 시험대였다. 고기를 사면 든든하지만, 고기를 사면 지갑이 허전해졌다. 지안은 닭가슴살 팩을 손에 들었다. “단백질은 꼭 챙겨야지”라는 문장이 머릿속에서 자동으로 재생됐다. 신혼이니까 건강도 챙겨야 하고, 미래를 위해 체력도 쌓아야 한다는, 말하자면 교과서 같은 삶의 문장들이 지안을 밀어 올렸다. 하지만 가격표는 교과서가 아니라 현실이었다.

지안은 결국 더 작은 팩을 골랐다. 그리고 속으로 계산했다. ‘이걸로 두 번… 아니, 세 번은 먹을 수 있게 나눠야 해.’ 고기는 이제 “얼마나 먹을까”가 아니라 “어떻게 나눌까”가 됐다.

그 다음은 유제품 코너였다. 우유는 꼭 필요했다. 남편 준호는 아침마다 커피를 타 마셨고, 지안도 가끔 시리얼을 먹었다. 우유는 생활의 흐름을 만들어 주는 재료였다. 지안은 평소 사던 브랜드를 집었다가, 옆에 붙은 더 저렴한 브랜드를 집었다. 그리고 두 개를 번갈아 들었다 내려놓았다. 마치 마음이 두 갈래로 찢기는 것처럼.

“맛이… 많이 다르려나.” 지안은 혼잣말처럼 말했다. 우유 맛이 얼마나 다르겠냐고 스스로를 설득하면서도, 마음 한 구석에는 ‘이걸 바꾸면 내가 살림을 망치는 건 아닐까’ 같은 이상한 죄책감이 피어올랐다. 마치 소비가 인격을 증명하는 것처럼 느껴지는 순간이 있었다. 좋은 걸 사야 좋은 사람이 되는 것 같고, 싼 걸 사면 뭔가를 포기하는 것 같고, 포기하면 실패한 것 같고. 지안은 그런 감정을 싫어했다. 싫어하면서도 자꾸 끌려갔다.

지안은 “브랜드”보다 “용도”를 먼저 적었다. 우유는 커피용인지, 요리용인지, 그대로 마실 건지에 따라 선택이 달라졌다. 같은 물건도 목적이 분명하면 고민 시간이 줄었다.

전단지의 “행사”는 지안에게 함정이기도 했다. 필요하지 않은 물건을 ‘싸게’ 산다고 착각하는 순간, 장바구니가 계획을 배신했다.

지안은 라면 코너 앞에서 발걸음을 멈췄다. 라면은 늘 비상식량이었다. 바쁠 때, 늦게 들어왔을 때, 감정이 고단할 때, 라면은 손쉽게 위로가 됐다. 그런데 라면은 “비상”이 아니라 “주식”이 되면 안 된다는 걸 지안은 알고 있었다. 건강에도, 마음에도. 지안은 라면 대신 냉동만두를 집었다. 만두는 적당히 든든하고, 국도 끓일 수 있고, 볶아도 됐다. “다용도”라는 말이 손끝에서 반짝였다.

그리고 그때, 지안의 휴대폰이 울렸다. 준호였다.

“여보, 장 보고 있어? 필요한 거 있으면 말해.”

“응… 지금 보고 있어.”

“오늘은 뭐 해 먹을까? 나 요즘… 집밥이 제일 좋아.”

준호의 말이 따뜻해서, 지안은 더 마음이 조여 왔다. 집밥이 좋다는 말은 지안을 기쁘게 해야 맞았다. 그런데 그 말은 동시에 책임이기도 했다. ‘내가 잘해야 한다’는 책임. ‘내가 똑똑하게 사야 한다’는 책임. ‘내가 실수하면 안 된다’는 책임. 지안은 웃으며 말했다. “그냥… 있는 걸로 간단하게 해 먹자.” 그러고는 서둘러 통화를 끊었다. 목소리가 떨릴까 봐.

계산대로 가는 길에 지안은 과일 코너를 한 번 쳐다봤다. 사과가 반짝였다. 반짝이는 건 대체로 비쌌다. 지안은 사과를 하나 집었다가, 다시 내려놓았다. ‘오늘은 안 사도 돼.’ 그런데 내려놓는 순간, 마음은 이상하게 쓸쓸해졌다. 사과 하나가 사치가 된 세상에서, 신혼의 설렘은 종종 생활비로 환산됐다.

과일 코너의 가격표와 진열된 사과
반짝이는 과일 앞에서, 마음이 먼저 계산을 시작했다.

계산대에 줄을 섰다. 앞사람 카트에는 물티슈, 과자, 탄산수, 아이스크림이 가득했다. 지안은 부러움과 안도감을 동시에 느꼈다. ‘나는 저렇게 안 담았으니까 괜찮겠지.’ ‘그래도 저 사람도 결국 비슷하게 나오겠지.’ 생각이 뒤엉켰다. 계산대 옆에 놓인 껌과 초콜릿이 지안을 유혹했지만, 지안은 시선을 돌렸다. 작은 유혹이 큰 금액으로 이어지는 걸 이제는 알았다.

드디어 지안 차례였다. 계산원은 물건들을 익숙한 손놀림으로 찍었다. “띡, 띡, 띡.” 그 소리는 마치 시간의 초침처럼 규칙적이었다. 지안은 숨을 가볍게 들이마셨다. 그리고 화면에 떠오르는 숫자를 봤다.

“총 98,460원입니다.”

지안의 어깨가 아주 조금 내려앉았다. ‘넘지 않았다.’ 목표는 지켰다. 그런데 그 안도감은 오래 가지 않았다. 지안은 영수증을 받아 들고, 봉투를 들고, 출구를 지나며 생각했다. ‘이 정도 산 걸로 10만원 가까이…’ 바구니는 여전히 가벼웠다. 그런데 숫자는 묵직했다. 가벼운 바구니와 묵직한 숫자가 서로 어긋나면서, 지안은 그 어긋남 속에서 길을 잃었다.

집에 돌아와 봉투를 풀자, 물건들은 금세 제자리를 찾았다. 냉장고는 잠깐 풍성해 보였다. 하지만 풍성함은 오래가지 않았다. ‘일주일은 가려나.’ 지안은 생각했다. 그리고 그 생각의 끝에는 늘 같은 질문이 붙었다. ‘다음 주엔 어떡하지.’

준호가 퇴근해 들어오자, 지안은 최대한 평소처럼 웃었다. “왔어?” 준호는 목도리를 풀며 지안을 안았다. “추워. 오늘 장봤다며? 고생했네.” 준호의 말이 다정해서, 지안은 더더욱 말하지 못했다. ‘오늘 거의 10만원이야’라고 말하면, 준호가 어떤 표정을 지을지 상상했다. 걱정하는 얼굴, 미안해하는 얼굴, 괜찮다고 말하며 더 야근을 떠올리는 얼굴. 지안은 그 얼굴들을 원치 않았다.

저녁은 된장찌개와 계란말이였다. 양파는 반 개만 넣었다. 파는 흰 부분만 먼저 썼다. 지안은 식탁에 반찬을 놓으며 스스로에게 말했다. ‘잘하고 있어.’ 그런데 “잘하고 있다”는 말은 때때로 “버티고 있다”는 말과 비슷했다.

준호가 밥을 먹다 말고 말했다. “요즘… 진짜 다 비싸지?”

지안은 젓가락을 내려놓고 고개를 끄덕였다. “응. 그냥… 장보면 훅 가.”

준호는 잠깐 생각하더니, 아주 조심스럽게 말했다. “우리, 같이 방법을 찾아보자. 당신 혼자 고민하지 말고.”

그 말이 지안의 마음을 툭 건드렸다. 혼자 고민하지 말라는 말. 지안은 사실 혼자 고민하는 데 익숙해져 있었다. 결혼 전에는 자취를 했고, 자취는 늘 혼자 계산하는 삶이었다. 결혼을 했어도, ‘살림’은 묘하게 지안의 몫처럼 느껴졌다. 지안이 먼저 온라인 장바구니를 비교하고, 지안이 먼저 전단지를 보고, 지안이 먼저 ‘오늘은 뭘 해 먹지’를 떠올렸다. 준호는 늘 “맛있다”라고 말해 주었지만, “계산”을 함께 해 준 적은 많지 않았다. 아니, 정확히 말하면 지안이 계산을 보여 주지 않았다.

지안은 밥을 씹으며 말없이 고개를 숙였다. 눈이 뜨거워졌다. 왜인지 모르겠는데 눈이 뜨거웠다. ‘나는 울고 싶지 않은데.’ 지안은 속으로 중얼거렸다. 울고 싶은 건 장바구니 때문이 아니라, 장바구니 하나로 마음이 무너져 버린 자신 때문이기도 했다.

“혼자 고민하지 말고.” 그 말 하나가 지안의 삶을 조금 바꿨다. 물가를 낮출 수는 없지만, 고민의 무게를 나눌 수는 있었다.

그날 밤, 둘은 식탁 위에 영수증을 펼쳤다. 영수증의 글씨는 작았고, 항목은 길었다. 준호는 항목을 하나씩 읽었다. “우유, 계란, 두부…” 그리고 중간에 멈췄다. “이거, 우리가 꼭 매번 새로 사야 해?” 지안은 그 질문이 마음에 들었다. “새로”라는 단어가 문제의 핵심 같았다. 새로 사는 게 아니라, 있는 걸 어떻게 쓰느냐. 오늘의 소비가 아니라, 한 달의 흐름.

지안은 냉장고를 열고, 현재 가진 것들을 적기 시작했다. 남은 쌀, 냉동실의 고기 조각들, 서랍의 마른 김, 유통기한이 임박한 두부, 오래된 소스들. 준호는 그 옆에서 메모장을 열고 “이번 주 메뉴”를 적었다. 단순한 계획표인데, 그 계획표가 둘에게는 지도 같았다. 지도는 길을 보여 주는 게 아니라, 길을 잃지 않게 해 주었다.

둘은 ‘장보기 전에 먼저 확인하기’를 규칙으로 만들었다. 냉장고와 팬트리를 사진으로 찍어 두면, 마트에서 “집에 있었나?”를 덜 떠올려도 됐다.

지안은 “꼭 필요한 것(필수)”과 “있으면 좋은 것(선택)”을 분리했다. 장보기 중에 마음이 흔들리면, 선택 목록은 잠시 미뤘다.

며칠 뒤, 지안은 동네 마트 대신 시장에 가 보기로 했다. 시장은 어릴 때 엄마 손을 잡고 다니던 곳이었다. 그런데 결혼하고 나서는 시장이 멀게 느껴졌다. 카드 할인도 없고, 주차도 불편하고, 흥정은 괜히 어색했다. 하지만 요즘은 불편함과 절약이 같은 방향을 가리키는 경우가 많았다.

시장은 생각보다 따뜻했다. 사람들의 목소리가 따뜻했고, 봉지에 담기는 채소가 따뜻했고, “아가씨, 이건 덤으로 가져가”라는 말이 따뜻했다. 지안은 ‘아가씨’라는 호칭에 웃음이 났다. 결혼했는데도, 시장에서는 여전히 아가씨였다. 그리고 그 호칭이 지안을 잠깐 가볍게 만들었다.

전통시장에서 채소를 고르는 손과 따뜻한 조명
시장에서는 숫자뿐 아니라 말 한마디가 함께 오갔다.

물론 시장이 언제나 더 싼 건 아니었다. 어떤 품목은 마트가 더 쌌고, 어떤 품목은 시장이 더 신선했다. 중요한 건 ‘전부를 한 곳에서 해결해야 한다’는 생각을 버리는 것이었다. 지안은 시장에서 채소를 사고, 마트에서 생필품을 사고, 온라인에서 무거운 물건을 주문했다. 그리고 그 과정이 이상하게도 지안을 덜 불안하게 만들었다. 선택지가 늘면 불안도 늘 것 같았는데, 지안에게는 반대였다. 선택지가 늘자, “무조건 당해야 하는 가격”이 줄었다.

준호도 변했다. 퇴근 후에 할인 마감 시간에 맞춰 마트에 들러 빵을 사 오기도 했다. “오늘은 이거 세일했더라.” 준호가 그렇게 말할 때마다 지안은 묘하게 안도했다. 지안 혼자만의 전쟁이 아니라는 느낌. 둘이서 함께 건너는 강이라는 느낌. 물가라는 강은 깊고 넓었지만, 둘이 손을 잡으면 조금 덜 무서웠다.

어느 날 준호가 말했다. “나, 예전엔 10만원이 그냥 숫자인 줄 알았어.”

지안이 웃었다. “지금은?”

준호가 고개를 갸웃했다. “지금은… 한 주의 밥 냄새 같아.”

한 주의 밥 냄새. 지안은 그 표현이 마음에 들었다. 숫자가 냄새가 될 수 있다는 건, 숫자가 누군가의 삶을 담고 있다는 뜻이었다. 사람들은 물가 이야기를 할 때 대개 분노하거나 체념했지만, 지안은 그 사이에서 다른 감정을 찾고 있었다. ‘나는 지금 이걸로 내 삶을 만들고 있어.’라는 감정. 비싸진 세상에서 싸우는 게 아니라, 비싸진 세상에서도 살 수 있는 나만의 방법을 만드는 감정.

그래도 가끔은 무너졌다. 할인도, 계획도, 시장도, 온라인도, 결국 “오늘은 왜 이렇게 많이 나왔지”라는 질문을 완전히 없애 주지는 못했다. 예상치 못한 손님이 오면 반찬을 더 해야 했고, 감기에 걸리면 과일을 사야 했고, 바쁜 날에는 배달을 시켜야 했다. 생활은 계획표를 배려해 주지 않았다.

그런 날, 지안은 다시 계산대에서 “총 100,780원입니다” 같은 말을 들으며 멍해졌다. 그리고 집에 돌아와 현관에서 잠깐 서 있었다. 손에는 봉투가 들려 있었고, 봉투는 무겁지 않았다. 그런데 마음은 무거웠다. 지안은 그 무게를 들고 거실로 들어갔다.

저녁의 주방, 식탁 위 장바구니와 조용한 조명
가끔은 숫자보다 마음이 먼저 지쳤다.

준호는 지안의 얼굴을 보고 말없이 다가와 봉투를 받아 주었다. “오늘 많이 나왔어?” 준호의 질문은 추궁이 아니라 확인이었다. 지안은 고개를 끄덕였다. “응. 근데… 진짜 얼마 안 샀는데.” 그 문장이 또 나왔다. 지안은 그 문장이 싫어서 웃었다. 웃고 나니 눈물이 날 것 같아서, 더 크게 웃었다.

준호가 말했다. “괜찮아. 우리, 지금도 잘하고 있어.”

지안은 그 말을 듣고 생각했다. ‘잘하고 있다’는 말이 단순한 위로가 아니라, 사실이라는 걸 믿고 싶었다. 지안은 오늘 산 것들을 하나씩 꺼내며, 마음속으로 이름을 붙였다. 두부는 “내일 국”, 계란은 “모레 도시락”, 양파는 “그 다음 날 볶음”, 우유는 “아침의 커피”. 물건들이 계획표 안으로 들어오자, 숫자는 조금 덜 무서워졌다. 숫자는 여전히 컸지만, 숫자 안에 ‘살아갈 시간’이 보이기 시작했다.

지안은 깨달았다. 물가가 오르면, 장보기는 단순히 절약의 문제가 아니라 ‘불안을 다루는 기술’이 된다는 걸. 그리고 그 기술은 혼자 배우는 게 아니라, 함께 배우는 게 더 빠르다는 걸.

계절이 한 번 더 바뀌었을 때, 지안은 또다시 마트에 섰다. 손바구니를 들고, 전단지를 보고, 가격표를 읽고, 계산대에 줄을 섰다. 변화는 세상을 한 번에 바꾸지 않았다. 하지만 변화는 지안의 시선을 바꿨다. 지안은 이제 ‘10만원’이라는 숫자 앞에서 완전히 무너지지 않았다. 그 숫자가 갑자기 작아진 건 아니었다. 오히려 숫자는 더 커질 때도 있었다. 다만 지안은 숫자와 함께 숨 쉬는 법을 배웠다.

계산원이 말했다. “총 101,230원입니다.”

지안은 잠깐 멈췄다. 그리고 웃었다. 예전 같았으면 속이 철렁 내려앉았을 텐데, 오늘은 웃음이 나왔다. 지안은 카드로 결제하며 생각했다. ‘그래, 오늘은 초과했네. 대신 이번 주는 냉장고를 더 잘 쓰면 돼.’ 지안의 마음속에는 ‘되돌릴 수 없는 실패’ 대신 ‘조정할 수 있는 흐름’이 자리 잡고 있었다.

집으로 돌아가는 길, 지안은 봉투를 들고 걸었다. 길가의 불빛이 봉투에 비쳤다. 봉투는 여전히 무겁지 않았다. 하지만 지안은 그 봉투가 담고 있는 것이 단지 물건만이 아니라는 걸 알았다. 봉투에는 둘의 한 주가 들어 있었고, 둘의 식탁이 들어 있었고, 둘의 대화가 들어 있었다. 그리고 무엇보다, 둘이 함께 살아가겠다는 약속이 들어 있었다.

밤길을 걸으며 장바구니를 들고 있는 사람의 뒷모습
장바구니는 가볍게, 마음은 단단하게.

현관문을 열자, 집 안의 공기가 포근했다. 지안은 봉투를 내려놓고 잠깐 숨을 골랐다. ‘오늘도 해냈다.’ 지안은 그렇게 생각했다. 거창한 승리도 아니고, 대단한 성취도 아니었다. 하지만 ‘오늘도 해냈다’는 말은 지안에게 필요한 말이었다. 물가가 오르는 세상에서, 누군가는 매일 그런 말을 스스로에게 해 줘야 했다.

준호가 거실에서 고개를 내밀었다. “왔어? 오늘은 뭐 사 왔어?”

지안은 웃으며 대답했다. “우리가 살아갈 것들.”

준호가 웃었다. “좋네. 그럼 오늘 저녁은?”

지안은 잠깐 고민했다. 그리고 말했다. “있는 걸로, 맛있게.”

그 말은 이제 절약의 변명이 아니라, 삶의 방식이 되어 가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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