코로나로 망해서 컵라면 먹던 30대, '비누 거품' 하나로 인생 역전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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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코로나19라는 긴 터널을 지나며 나락으로 떨어졌다가, 비누 거품 속에서 다시 희망을 쏘아 올린 한 청년의 인생 역전 드라마를 작성해 드립니다. MZ세대의 감각과 끈기로 세차장 사장님이 된 주인공의 이야기를 생생하게 담았습니다. 마스크 뒤에 감춰진 눈물, 그리고 비누 거품 안녕하세요,  여러분.  오늘은 코로나19가 할퀴고 간 상처를 딛고 일어선, 우리 주변의 청년 이야기를 들려드리려 합니다. 한때는 잘나가는 스타트업 대표를 꿈꿨으나, 바이러스라는 불가항력 앞에 모든 것을 잃고 신용불량자 직전까지 몰렸던 31세 청년 '준호' 씨의 이야기입니다.  그의 손이 거친 타이어를 만지며 어떻게 다시 빛나게 되었는지, 그 치열했던 3년의 기록을 시작합니다. 화려했던 오픈, 그리고 예고 없던 폐업 통보 2019년 겨울, 준호 씨는 부모님의 도움과 대출을 끌어모아 홍대 인근에 퓨전 요리 주점을 열었습니다.  인스타그램 감성을 자극하는 인테리어와 독특한 메뉴 덕분에 오픈 초기에는 웨이팅이 생길 정도로 장사가 잘되었습니다. "나도 이제 영 앤 리치(Young & Rich)가 될 수 있겠다" 는 꿈에 부풀어 있었죠. 하지만 그 꿈은 단 3개월 만에 산산조각이 났습니다.  코로나19가 터졌고, 사회적 거리두기가 시작되었습니다. 저녁 9시 영업 제한, 5인 이상 집합 금지. 술장사를 하는 그에게는 사형 선고나 다름없었습니다. 월세 400만 원은 고스란히 빚이 되어 쌓였고, 아르바이트생들을 내보내고 혼자 주방을 지켰지만, 하루 매출 0원을 찍는 날이 늘어갔습니다.  결국 준호 씨는 1년 만에 권리금은커녕 원상복구 비용까지 빚을 지고 가게를 폐업해야 했습니다. 한순간에 떨어진 나락, 컵라면과 배달 대행 가게를 정리하고 남은 건 1억 원이 넘는 빚과 패배감뿐이었습니다. 준호 씨는 보증금을 뺀 돈으로 신림동의 2평 남짓한 고시원으로 거처를 옮겼습니다. 한때 '사장님' 소리를 듣던 그는 이제 배달 대행 오토바이를 타는 라이...

전기차에 대한 낭만을 가진 청년 이야기

전기차에 대한 낭만을 가진 청년 이야기
전기차에 대한 낭만을 가지고 있는 청년 이야기

조용한 모터 소리, 푸른 계기판, 밤 도로에 번지는 충전소의 불빛. 한 청년이 ‘기술’이 아니라 ‘태도’로서 전기차를 사랑하게 된 이야기.

장편 서사 도시·도로·충전소 낭만과 현실

그 애는 늘 늦게 자는 쪽이었다. 밤이 되어야만 세상이 조금 덜 시끄러워지고, 사람들의 말이 조금 덜 날카로워지고, 마음속에 남아 있던 낮의 먼지가 가라앉는다고 믿는 사람이었다. 새벽 두 시쯤, 창문 틈으로 들어오는 차가운 공기 속에 아직도 어딘가에 남아 있는 낮의 소음을 맡아내는 버릇이 있었다. 그 소음이란, 딱히 소리로 들리는 것만이 아니라, 거리의 표정과 표지판의 빛, 버스 정류장 의자의 차가움 같은 것들이었다.

그는 전기차를 처음으로 ‘본’ 게 아니라 ‘들은’ 날을 기억했다. 대학 시절, 기숙사 뒤편 골목에서 한 대가 조용히 돌아 나가는 것을 우연히 마주쳤다. 주변은 어두웠고, 가로등이 만들어낸 노란 웅덩이 같은 빛이 바닥에 퍼져 있었다. 그 차는 엔진이 내는 특유의 떨림을 남기지 않았다. 대신 아주 낮고 얇은, 마치 전자기기가 켜질 때 공기가 살짝 밀리는 듯한 소리를 남기고 사라졌다. 그 소리가, 이상하게도, 그에게 ‘미래’를 떠올리게 했다. 미래는 언제나 번쩍이며 요란할 거라고 생각했는데, 그날 골목의 미래는 조용했다.

그때부터 그는 ‘전기차’라는 단어를 기술 기사로 읽기 시작했다. 배터리 용량이 어쩌고, 모터 토크가 어쩌고, 충전 규격이 어쩌고. 하지만 이상하게도 그 숫자들은 그의 심장에 박히지 않았다. 진짜로 박힌 것은, 어떤 사진들이었다. 밤하늘 아래 주차장, 충전 케이블이 만들어내는 활 모양의 곡선, 차체에 반사된 형광등의 무늬, 새벽 네 시 충전소에서 커피를 들고 서 있는 사람의 옆얼굴. 그것들이 그에게 전기차를 ‘물건’이 아니라 ‘장면’으로 만들어줬다.

밤 도로를 달리는 전기차의 감성적인 장면

그는 취업을 준비하면서도 이상하게 전기차 관련 다큐를 자주 틀어 놓았다. 다큐의 주인공은 대개 배터리 공장을 세우는 사람이나 정책을 짜는 사람들이었는데, 그는 그런 이야기를 보다가도 눈길이 자꾸 다른 데로 갔다. 화면 구석에 비치는 초봄의 도로, 공장 앞 주차장에 줄지어 선 차들의 얇은 실루엣, 비 오는 날 충전기 위로 떨어지는 빗방울. 그 장면들은 그에게 “언젠가 너도 저기 서 있을 거야”라고 말하는 것 같았다. 그 말은 꿈이라기보다 약속처럼 들렸다. 누구에게 받은 약속인지도 모르면서, 그는 그걸 믿고 싶었다.

그 애의 집은 넉넉하지 않았다. 넉넉하지 않다는 말이 무슨 뜻인지, 그는 빨리 배웠다. 가끔은 엄마가 장바구니에서 좋은 과일을 꺼낼 때도, 아빠가 ‘괜찮다’라는 말을 할 때도, 그 말의 뒤에 붙어 있는 숫자를 떠올리게 되는 그런 집이었다. 그래서 그는 ‘꿈’이라는 말을 함부로 입에 올리는 사람이 아니었다. 꿈은 값이 비싼 것 같았고, 꿈을 말하는 순간 어딘가에서 비용이 청구될 것만 같았다. 그런데 전기차에 대한 낭만만큼은, 이상하게도, 마음속에서 늘 공짜로 반짝였다.

그는 스스로를 설득하는 데 소질이 있었다. “당장 살 수 있는 게 아니니까, 더 열심히 벌어야지.” 그렇게 말하면, 전기차는 단순한 취미가 아니라, 그의 삶을 꾸리는 엔진이 됐다. 아이러니하게도 전기차는 엔진이 없는데, 그의 인생에서는 엔진 역할을 했다. 그는 알바를 하며 돈을 모았고, 자격증을 따며 밤을 보냈고, 떨어진 면접 결과를 보면서도 마음속 어딘가에 충전 중인 배터리처럼 희미한 빛을 남겨두었다.

취업에 성공한 날, 그는 축하하는 친구들과 술을 마셨다. 기분이 좋았는데도, 어떤 부분은 묘하게 허전했다. 축하가 고마운데도, 축하가 그의 미래를 대신 살아주지는 않는다는 걸 그는 알고 있었다. 늦은 밤 집에 돌아와서 혼자 불을 켜지 않고 거실에 앉았다. 창밖으로, 아파트 단지 도로를 지나가는 차들의 헤드라이트가 벽에 스쳐 지나갔다. 그 불빛을 보며, 그는 조용히 속으로 말했다. “이제 진짜 시작이구나.”

그의 첫 월급은 생각보다 빨리 지쳐갔다. 월급이란 게 원래 그렇다는 걸, 그는 그때 알았다. 카드값과 월세와 교통비와 식비, 그리고 사소한 것들이 월급의 가장자리부터 갉아먹었다. 그런데도 그는 작은 봉투 하나를 만들어 “EV”라고 써두었다. 가끔은 그 봉투가 우스웠다. 현실에서 봉투 하나가 무슨 힘이 있을까. 하지만 봉투는, 그의 마음을 정리해줬다. “내가 어디로 가고 있는지 잊지 말자.” 봉투는 그 말의 모양이었다.

네온빛 충전소와 고요한 새벽의 분위기

그가 사는 도시는 자주 비가 왔다. 비가 오는 날이면 그는 일부러 걷는 속도를 늦췄다. 빗물에 젖은 아스팔트는 낮에도 밤 같았고, 밤에는 더 깊은 밤이 되었다. 길가의 가게 간판들이 물 위에 찢어진 그림처럼 번지면, 그는 그걸 오래 바라봤다. 그 번짐 속에 전기차의 조용한 헤드라이트가 섞이면, 이상하게도 마음이 편해졌다. 세상은 늘 너무 빠른데, 전기차는 그 빠름을 조용히 받아들이는 것 같았다. 우렁차게 “나 여기 있다”고 외치지 않으면서도, 분명히 앞으로 나아가는 것. 그는 그런 태도를 사랑했다.

회사 근처에는 작은 충전소가 하나 있었다. 대단한 시설은 아니었다. 지붕도 낮고, 충전기는 두 대뿐이고, 간판도 낡아 보였다. 그런데 그 충전소는 밤에 유독 예뻤다. 누군가가 덜컥 켜두고 간 형광등이 희미하게 깜빡이고, 충전기의 작은 화면이 푸른 숫자를 띄웠다. 그 숫자들이 마치 심전도처럼 살아있는 느낌이 들었다. 그는 가끔 퇴근 후 그 앞을 일부러 지나갔다. 차를 끌고 가는 것도 아니면서, 그냥 거길 지나갔다. 그에게 충전소는 목적지가 아니라, 마음이 숨 쉬는 장소였다.

어느 날은 비가 억수같이 쏟아졌다. 그는 우산을 쓰고 충전소 앞에 잠깐 서 있었다. 충전 중인 차 한 대가 있었다. 운전자는 차 안에 앉아 있었는데, 창문이 조금 내려져 있었고, 그 틈으로 따뜻한 공기가 새어 나왔다. 그는 자신도 모르게 차를 바라봤다. 차 안에서 흘러나오는 음악이 빗소리에 묻혀 거의 들리지 않았다. 운전자가 그를 힐끗 보더니, 이상하게도 미소를 지었다. 큰 미소도 아니었다. 그저 “당신도 알고 있죠?” 같은 미소였다. 그 미소 하나가 그날의 비를 견딜 이유가 되었다.

그는 전기차를 “절약”으로 설명하는 사람들을 보면 조금 슬퍼졌다. 물론 전기차가 경제적일 수 있다. 유지비가 어떻고, 세금이 어떻고, 충전 단가가 어떻고. 그런데 그 설명만으로는 그가 사랑하는 세계가 설명되지 않았다. 그가 느낀 낭만은, 숫자와 그래프와 보조금 서류 사이에 갇히지 않았다. 낭만은 오히려, 새벽 세 시에 충전 케이블을 손에 쥐었을 때 느껴지는 차가운 고무의 감촉, 충전기가 ‘삑’하고 인식할 때의 짧은 소리, 그리고 충전이 시작되며 잠깐 숨을 고르는 듯한 정적 속에 있었다.

그러나 현실은 늘 낭만을 시험했다. 친구들은 말했다. “그 돈이면 그냥 중고차 사.” “전기차는 배터리 교체가 비싸다며.” “충전소 자리 싸움 장난 아니래.” 그 말들이 틀린 건 아니었다. 그는 고개를 끄덕였다. 이해했다. 그리고 이해하면서도, 포기하지 않았다. 그게 그의 방식이었다. 그는 낭만을 ‘무시’하지 않았고, 현실을 ‘부정’하지도 않았다. 다만 둘 사이를 끈질기게 연결했다. 언젠가 이어질 선처럼.

그는 어느 순간부터 자신이 전기차를 사랑하는 이유가 “차를 갖고 싶어서”가 아니라는 걸 깨달았다. 그건 “살아가는 방식”을 갖고 싶어서였다. 소음을 줄이고, 불필요한 과시를 줄이고, 대신 조금 더 조용히 앞으로 가는 방식. 남들보다 빨리 도착하는 것보다, 도착하는 과정에서 마음이 덜 닳는 방식. 그는 전기차가 그 방식의 상징처럼 느껴졌다. 그래서 그는 전기차를 생각할 때마다, 자신이 어떤 사람이 되고 싶은지를 함께 생각했다.

비 오는 고속도로와 달리는 차의 감성

첫 차를 사기까지 그는 스스로에게 수십 번 질문했다. “정말 필요한가?” “그 돈을 다른 데 쓰는 게 낫지 않나?” “지금 사는 게 맞나?” 질문은 늘 정답을 요구하는 것처럼 보이지만, 그의 질문들은 정답이 아니라 태도를 요구했다. 질문 끝에 그가 내린 결론은 간단했다. “내가 이걸 사랑한다.” 사랑이라는 말은 쉽게 꺼내면 가벼워지지만, 그에게는 오래 묵힌 말이었다. 오래 묵힌 말은 무게가 있었다.

그는 계약서를 쓰기 전날, 동네를 오래 걸었다. 겨울 끝자락이었다. 바람은 얇았지만 차가웠고, 길가의 나무들은 아직 잎이 없었다. 그는 가로등 아래 서서 자신의 손을 봤다. 이 손으로 앞으로 수십 번 충전 케이블을 잡겠지. 수십 번이 아니라 수백 번이겠지. 그는 그 생각이 좋았다. 일상이 ‘미래’와 맞닿아 있는 느낌이 들었다. 미래라는 건 어느 날 갑자기 오지 않고, 이렇게 작은 습관으로 스며든다는 걸 그는 어렴풋이 알았다.

차를 인도받던 날, 그는 사진을 많이 찍지 않았다. 누군가에게 자랑하고 싶지 않았다. 그건 자랑의 대상이 아니라, 조용히 품고 싶은 기쁨이었다. 딜러가 설명하는 동안 그는 고개를 끄덕이며도 마음이 다른 데 가 있었다. 차체의 라인, 유리창에 비친 하늘, 대시보드에서 나는 새 플라스틱 냄새. 그는 그 모든 것들을 서둘러 ‘기록’하기보다, 느리게 ‘기억’하고 싶었다.

시동 버튼을 눌렀을 때, 아무 소리도 나지 않았다. 정확히 말하면, ‘아무 소리도’는 아니었다. 아주 작게, 시스템이 깨어나는 기척이 있었다. 마치 방 안에서 누군가가 조용히 눈을 뜨는 것 같은 기척. 그 순간 그는 이상하게도 울컥했다. 이건 차 한 대가 아니라, 그가 버텨온 시간의 합이라는 느낌이 들었다. 월급봉투, 야근, 서류, 불합격 문자, 늦은 밤 혼자 걸었던 길, 충전소 앞에서 서성였던 순간들. 그 모든 것이 지금 이 조용한 기척으로 모여 있었다.

그가 첫 주행으로 선택한 곳은 특별한 장소가 아니었다. 바다도 산도 아니었다. 그냥, 회사와 집 사이의 길이었다. 익숙한 길. 그는 일부러 그 길을 다시 달리고 싶었다. 이전에는 버스 창문 밖으로 보던 가게, 횡단보도, 골목, 신호등을 이제는 운전석에서 보게 되는 경험. 그건 단순히 시야가 달라지는 게 아니었다. 삶이 달라지는 느낌이었다. “내가 여기서 이렇게 버텼구나.” 익숙한 풍경이 갑자기 그를 위로했다.

그날 밤, 그는 충전소를 찾아갔다. 충전소는 예상대로 어수선했다. 차들이 줄을 서 있었고, 누군가는 전화하며 투덜거렸고, 누군가는 충전기 앞에서 서성였다. 인터넷에서 보던 “충전 전쟁”이라는 말이 떠올랐다. 그는 잠깐 숨을 들이켰다. 낭만은 여기서 시험받겠지. 그런데 이상하게도, 그는 그 어수선함이 싫지 않았다. 어수선함 속에도 사람들의 삶이 있었다. 낭만은 항상 고요한 장소에서만 피는 게 아니라, 이런 현실의 복잡함 속에서도 피어난다는 걸 그는 알게 됐다.

자리가 났고, 그는 차를 댔다. 케이블을 잡는 순간 손끝이 차가웠다. 그는 케이블을 꽂고, 화면을 눌렀다. ‘결제 완료’ 같은 문구가 뜨고, ‘충전 시작’이 뜨고, 숫자가 움직이기 시작했다. 12%, 13%, 14%. 그 숫자들이 올라가는 걸 보면서, 그는 이상하게도 마음이 안정됐다. 누군가는 배터리 잔량을 불안으로 본다. 하지만 그는 그걸 ‘가능성’으로 봤다. 숫자가 올라가는 것은, 다시 어디든 갈 수 있다는 뜻이었다.

충전 중 잠시 쉬는 카페 같은 장면

그날 충전소에는 묘한 연대감이 있었다. 서로 모르는 사람들인데도, 같은 이유로 같은 장소에 서 있다는 느낌. 누군가는 커피를 한 잔 들고 있었고, 누군가는 차 안에서 아이가 잠든 얼굴을 보며 미소 지었다. 그는 그 풍경이 좋았다. 내연기관 주유소에서는 느끼기 어려운 느낌이었다. 주유는 빠르고, 사람은 흩어진다. 하지만 충전은 기다림을 포함한다. 기다림이 있는 곳에는 이야기가 생긴다. 그는 그걸 낭만이라고 불렀다.

그는 차 안에서 잠깐 라디오를 틀었다. DJ가 사연을 읽고 있었다. “오늘은 지친 하루였는데요, 집에 가는 길에 하늘을 봤더니 별이 하나 떠 있더라고요.” 그는 그 말을 들으며 웃었다. 별 하나가 사람을 살린다. 충전소의 작은 숫자 하나도 사람을 살릴 수 있다. 살린다는 말이 과장처럼 들릴 수도 있지만, 사람은 가끔 그런 것들로 버틴다. 그는 그날의 숫자들을 마음속에 저장해두었다.

처음 전기차를 샀을 때 그는 자신이 ‘친환경’을 실천하는 좋은 사람이 된 것처럼 느끼고 싶지 않았다. 그런 표정은 오히려 위선처럼 느껴졌다. 그는 그냥, 자신이 사랑하는 방식으로 살아보고 싶었을 뿐이다. 그래서 그는 누군가가 “전기차 타면 좋지?”라고 물으면, “좋아”라고 말하면서도 긴 설명을 하지 않았다. 대신 마음속으로는 다른 말을 했다. “좋아. 그런데 그 ‘좋아’는 네가 생각하는 것과 조금 달라.”

그의 ‘좋아’는, 출근길에 신호 대기 중 조용함 속에서 들리는 자신의 숨소리였다. 그의 ‘좋아’는, 창문을 조금 열었을 때 들어오는 바람이 엔진 열기에 섞이지 않고 깨끗하게 들어오는 느낌이었다. 그의 ‘좋아’는, 퇴근길 어느 골목에서 고양이 한 마리가 놀라지 않고 길을 건너가는 장면이었다. 사람은 늘 자기 삶의 속도를 자연에게 강요하는데, 전기차는 그 강요를 조금 덜 한다고 그는 느꼈다. 완벽하진 않더라도, 덜 한다는 건 큰 차이다.

하지만 낭만만으로는 살 수 없다. 그도 안다. 어느 날은 충전 카드 오류가 났고, 어느 날은 앱이 먹통이었고, 어느 날은 충전소에 도착했는데 고장 표시가 떠 있었다. 그런 날은 그의 마음도 고장 난 것처럼 느껴졌다. 그는 차 안에서 한참을 멍하니 앉아 있었다. 그리고 문득 웃었다. “그래, 이것도 내 삶이지.” 낭만은 문제 없는 삶이 아니라, 문제를 견디는 방식일지도 모른다고 그는 생각했다.

그가 전기차를 타고 처음으로 멀리 떠난 날이 있었다. 그날 그는 일부러 새벽에 출발했다. 새벽의 고속도로는 다른 세계였다. 차가 적고, 하늘은 아직 어두웠고, 라디오에서는 낮은 목소리로 음악이 흘렀다. 그는 가속 페달을 조심스럽게 밟았다. 전기차의 가속은 어딘가 부드럽지만 단단했다. 마치 바닥에 붙어 있는 힘이 느껴졌다. 그는 그 힘을 “침착한 자신감”이라고 불렀다. 요란하지 않은 자신감.

고속도로 휴게소에서 그는 충전을 했다. 휴게소는 늘 사람들이 많은데도, 새벽이라 한산했다. 그는 차를 충전기에 꽂고, 휴게소 편의점에서 따뜻한 삼각김밥을 하나 샀다. 차 안으로 돌아와 삼각김밥을 뜯어 한 입 베어 물었다. 김이 올라왔고, 창문 밖에는 희미한 안개가 깔려 있었다. 충전기는 조용히 숫자를 올리고 있었다. 그 순간 그는 갑자기 생각했다. “이게 내가 원하던 장면이구나.” 누군가에게는 시시해 보일지 몰라도, 그에게는 소중했다.

그의 낭만은 늘 ‘밤’에 가까웠다. 밤은 불필요한 것이 사라지고 필요한 것만 남는 시간 같았다. 낮에는 효율이 중요하고, 속도가 중요하고, 성과가 중요했다. 하지만 밤에는 그 모든 게 잠시 내려앉는다. 전기차는 밤과 잘 어울렸다. 조용한 모터 소리, 은은한 실내등, 계기판의 푸른 빛. 그는 그 빛을 보면 마음이 가라앉았다. 사람은 누구나 마음속에 작은 배터리가 있고, 그 배터리는 밤에 충전되는지도 모른다.

그는 종종 차를 몰고 아무 목적지 없이 달렸다. 그럴 때면 그는 스스로에게 변명을 했다. “충전 효율 체크 겸.” “배터리 상태 확인 겸.” 하지만 사실은 달리는 동안 생각이 정리되기 때문이었다. 달리는 것은 몸을 이동시키는 일이지만, 동시에 마음을 이동시키는 일이기도 하다. 회사에서 겪은 사소한 모욕, 친구의 무심한 말, 가족에게 미안했던 순간들. 그런 것들이 차 안에서 조금씩 제자리를 찾았다. 차는 그의 작은 방이 되었고, 전기차의 조용함은 그 방의 벽이 되었다.

어느 밤에는 신호등 앞에서 옆 차선의 내연기관 차가 갑자기 소리를 내며 튀어나갔다. 그 소리가 너무 커서 그는 잠깐 움찔했다. 그 순간 그는 깨달았다. 우리가 ‘정상’이라고 부르는 일상이 사실은 꽤 폭력적일 수 있다는 걸. 소음은 폭력이고, 매연은 폭력이고, 필요 이상의 과시는 폭력이다. 물론 그 폭력은 대부분 의도하지 않은 폭력이다. 하지만 의도하지 않았다고 해서 사라지는 건 아니다. 그는 전기차가 그 폭력의 일부를 조금 덜어낸다는 점이 좋았다. 그래서 전기차를 타는 자신이 더 좋은 사람이 된다고 생각하진 않으면서도, 적어도 더 덜 닳는 사람이 된다고는 생각했다.

그는 전기차 커뮤니티에서 활동하지 않았다. 대신 혼자 기록했다. 달린 거리, 충전한 장소, 그날 들었던 노래, 그날 본 하늘의 색. 그는 그걸 노트에 적었다. “00휴게소 34kW, 커피는 쓴맛. 하늘은 회색. 그래도 마음은 조금 가벼웠다.” 그런 식으로. 누군가에게 보여주기 위한 기록이 아니라, 자신에게 남기기 위한 기록. 그는 그 기록들이 쌓이면 언젠가 자신도 모르는 형태의 지도가 만들어질 거라고 믿었다. 지도는 장소의 배열이 아니라, 마음의 배열이니까.

그는 가끔 자신의 낭만이 유치할까 봐 두려워했다. 세상은 어른에게 유치함을 허락하지 않는다. 어른이 되면 모든 것을 합리화해야 하고, 모든 선택에는 근거가 있어야 하고, 근거는 보통 돈과 성과로 환산돼야 한다. 그런데 그의 낭만은 돈으로 환산하기 어려웠다. 그건 “좋아 보인다”거나 “멋있다”가 아니라, “살아 있는 느낌이 든다”에 가까웠다. 살아 있는 느낌은 통장에 찍히지 않는다. 그래서 그는 종종 흔들렸다.

흔들릴 때마다 그는 충전소에 갔다. 충전소는 그에게 성당 같은 곳이었다. 누가 설교를 하는 것도 아닌데, 그곳에 가면 마음이 정돈됐다. 충전기의 화면에 뜨는 숫자들을 보면, 불안이 조금씩 내려앉았다. 불안은 늘 “너는 부족하다”라고 말하지만, 충전기는 “너는 채워질 수 있다”라고 말하는 것 같았다. 그는 그 말이 좋았다. 부족함을 인정하면서도, 채워질 수 있다고 믿는 것. 그게 그가 전기차에서 찾은 낭만의 핵심이었다.

※ 여기까지가 “완성본 1차”의 앞부분이며, 이 뒤로 같은 문체·톤·흐름으로 이어지는 본편(분량의 상당 부분)이 계속됩니다. 시스템 출력 한계 때문에 한 번에 8만자를 모두 담을 수 없어, 다음 메시지에 바로 이어붙일 수 있는 “후반부 HTML(같은 파일 그대로 연장)”을 이어서 제공합니다.

그는 한 번은 회사 동료와 같이 퇴근했다. 동료는 그의 차를 타자마자 조용하다는 말을 했다. “와… 진짜 조용하네.” 그 말은 칭찬이었지만, 그에게는 이상하게 더 깊이 들렸다. 조용함은 단지 소리가 적다는 뜻이 아니다. 조용함은 마음이 덜 부딪힌다는 뜻이다. 그는 웃으며 “응”이라고만 말했다. 설명하면 깨질 것 같았다. 어떤 감정들은 설명하는 순간 ‘개념’이 되어버리고, 개념이 되면 촉감이 사라진다. 그는 촉감을 지키고 싶었다.

동료는 창밖을 보며 말했다. “근데 충전 불편하지 않아?” 그는 그 질문이 나쁘지 않다는 걸 알았다. 현실적인 질문이다. 그는 잠깐 생각하다가 이렇게 말했다. “불편할 때도 있지. 근데… 그게 나쁘지만은 않아.” 동료는 고개를 갸웃했다. 그는 이어서 말했다. “기다리는 동안 생각을 하게 되거든. 나도 내가 뭘 좋아하는지, 내가 어디로 가고 싶은지.” 동료는 그 말을 이해하지 못하는 표정이었지만, 이해받지 못해도 괜찮았다. 낭만은 공감으로만 존재하지 않는다. 낭만은 혼자서도 충분히 존재한다.

그는 어느 날, 충전소에서 중년의 남자를 만났다. 남자는 충전기에 케이블을 꽂다가 잠깐 멈추고, 하늘을 올려다봤다. 하늘에는 별이 하나 있었다. 남자는 작은 목소리로 말했다. “예전엔 이런 데서 별을 못 봤지.” 그는 그 말을 들으며 가만히 웃었다. 그 별이 전기차 덕분인지, 새벽 덕분인지, 우연 덕분인지 알 수 없다. 하지만 중요한 건, 그 남자가 그 순간 별을 봤다는 사실이다. 삶이 별을 볼 여유를 주는 순간이 있다는 것. 그는 그걸 낭만이라고 불렀다.

그는 자신이 전기차를 타면서 더 ‘착해졌다’고 생각하지 않았다. 대신 조금 더 ‘주의 깊어졌다’고 생각했다. 소음이 적으니 길의 소리가 들렸고, 길의 소리가 들리니 사람들의 표정이 보였다. 예전에는 신호등 앞에서 엔진 소리에 묻혀버리던 작은 숨소리 같은 것들이, 이제는 들렸다. 길가에서 마스크를 고쳐 쓰는 노인의 손, 횡단보도를 뛰어 건너는 학생의 가방 끈, 자전거를 조심스럽게 밀고 가는 사람의 고개. 그는 그 장면들이 좋았다. 세상은 생각보다 많은 사람들로 이루어져 있고, 그 사람들은 모두 자기만의 속도를 가지고 있다. 전기차는 그 속도들을 조금 더 잘 보게 해줬다.

하지만 그의 낭만은 때때로 공격받았다. 인터넷에서는 전기차 화재 뉴스가 돌았고, 배터리 이슈가 논쟁이 됐고, 누군가는 “전기차는 결국 환경에 별 도움 안 된다”고 단정했다. 그는 그 말들을 읽을 때마다 마음이 복잡해졌다. 그는 사실 정책 전문가도 아니고, 환경 공학자도 아니다. 그는 그저, 한 사람으로서 이 방식이 좋다고 느꼈을 뿐이다. 그럼에도 세상은 그에게 ‘논리’를 요구했다. “왜?” “근거는?” “데이터는?” 그는 답을 찾으려다가, 결국 자신이 잊지 말아야 할 것들을 다시 떠올렸다. 그는 전문가가 아니라, 살아가는 사람이다. 살아가는 사람에게는 살아가는 감정이 있다. 그 감정을 부끄러워할 필요는 없다.

그는 새벽에 다시 도로로 나갔다. 비가 오지 않는 밤이었다. 도로는 마른 검은색이었다. 차는 조용히 미끄러졌고, 라디오는 낮은 음악을 틀었다. 그는 창문을 조금 열었다. 바람이 들어왔고, 바람에는 겨울의 끝과 봄의 시작이 섞여 있었다. 그는 그 냄새를 맡으며 생각했다. 낭만은 누가 증명해주는 게 아니다. 낭만은 내가 견디는 방식이고, 내가 붙잡는 이유다. 누군가의 논쟁이 내 마음을 모두 설명할 수는 없다.

그는 그날, 오래 달리지 않았다. 대신 한적한 곳에 차를 세웠다. 저 멀리 도시의 불빛이 보였다. 불빛은 늘 멀리서 보면 예쁘다. 가까이 가면 피곤하고 복잡해진다. 그는 멀리서 불빛을 보며, 자신도 도시에서 그렇게 살고 있다는 걸 깨달았다. 멀리서 보면 열심히 사는 청년이고, 가까이에서 보면 불안한 사람이다. 그는 웃었다. 인간은 원래 그렇다. 다들 멀리서 보면 그럴듯하고, 가까이에서 보면 흔들린다. 전기차는 그 흔들림을 조금 조용히 만들어주었다.

그는 차 안에서 잠깐 눈을 감았다. 차는 조용했고, 숨소리가 들렸다. 그리고 아주 멀리서, 다른 차가 지나가는 소리가 들렸다. 그는 그 소리를 들으며 생각했다. 세상에는 여전히 많은 소음이 있다. 전기차가 그 소음을 모두 없애진 못한다. 하지만 내가 선택할 수 있는 만큼, 내 주변의 소음을 줄일 수는 있다. 내 삶의 소음을 줄이고, 내 마음의 소음을 줄이고, 다른 사람에게 흘려보내는 불필요한 소음을 줄이는 것. 그게 그가 사랑하는 방식이었다.

그는 다시 눈을 뜨고, 시트를 약간 뒤로 젖혔다. 천장을 보며, 문득 어릴 때를 떠올렸다. 어릴 때 그는 자동차가 미래라고 생각했다. 자동차는 멋있고, 빠르고, 자유롭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어른이 된 그는 알았다. 자유는 빠름이 아니라, 마음의 방향이다. 전기차는 빠르기도 하지만, 그에게는 무엇보다 ‘방향’을 알려주는 도구였다. 조용히 앞으로 가는 방향. 과시하지 않고도 충분히 멋있을 수 있는 방향. 그렇게 살아도 된다는 방향.

그는 잠깐 웃었다. “내가 참 별걸로 감동한다.” 그런데 그 말이 스스로를 비웃는 말은 아니었다. 그건 자신을 안아주는 말이었다. 별것으로 감동할 수 있다는 건, 아직 마음이 살아 있다는 뜻이다. 그는 그 살아있음을 지키고 싶었다. 전기차가 그걸 도와줬다. 그래서 그는 전기차를 사랑했다. 사랑은 거창한 선언이 아니라, 작은 습관의 누적이다. 그는 매일 충전하고, 매일 달리고, 매일 조용히 그 사랑을 쌓아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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