코로나로 망해서 컵라면 먹던 30대, '비누 거품' 하나로 인생 역전하다
그의 이름은 신문에 자주 실렸다. 기업 인수, 새 공장 준공, 해외 투자, 기부 약정. 숫자로 환산하면 사람들의 환호가 붙고, 표정으로 환산하면 부러움이 붙는 삶이었다. 하지만 밤이 되면, 그 부러움은 미끄러운 바닥처럼 그를 지탱하지 못했다. 그는 늘 같은 시간에 같은 창을 바라보았다. 도심의 빛이 유리창에 부딪혀 조용히 번지고, 번진 빛이 다시 그의 얼굴로 돌아와 그늘을 만들었다.
사람들은 그를 회장이라고 불렀다. 누구도 그의 이름을 먼저 부르지 않았다. 이름은 가족에게만 쓰이는 물건처럼 남겨져 있었다. 그리고 그 이름을 가장 조심스럽게 불러야 할 사람이, 그에게는 있었다. 아들. 단 하나뿐인 아들. 수십 개 계열사보다 무겁고, 수만 명 임직원보다 예민하며, 어떤 언론 기사보다 치명적인 존재.
그의 아들은 ‘개망나니’라는 단어를 실감나게 만들었다. 남들이 말로 쓰는 모욕이 아니라, 현실의 체온과 냄새가 붙은 단어. 눈빛으로 사람을 누르고, 말투로 관계를 찢고, 돈으로 책임을 피하는 법을 너무 일찍 배웠다. 정확히 말하면, 돈이 아니라 ‘돈이 만들어주는 면책’에 익숙했다. 누군가 대신 사과하고, 누군가 대신 합의하고, 누군가 대신 기사를 막아주는 세계. 그 세계는 아들을 점점 더 비정상적으로 단단하게 만들었다.
그는 자신이 무엇을 잘못했는지 알고 싶었다. 정확히는, 무엇이 ‘잘못’인지 정의하고 싶었다. 경영에는 정의가 있었다. 손익, 리스크, 레버리지, 지배구조. 가족에도 정의가 있을 거라 믿었다. 가정이라는 조직에도 KPI가 있을 거라 믿었다. 그러나 아들을 키우는 일은, 성과로 측정되지 않았다. 심지어 실패도 명확하게 표기되지 않았다. 불행은 ‘상장’되지 않았고, 후회는 ‘보고서’가 되지 않았다.
그는 늘 확신이 있었다. 사람을 쓰는 데에는 자신이 있었다. 위기 때마다 구조조정을 단행했고, 필요하면 정리했고, 반드시 목표를 맞췄다. 그런데 아들의 문제 앞에서는, 오히려 그 능력이 독이 되었다. 그는 사람을 “관리”했다. 사랑을 관리하려 했다. 아들을 관리하려 했다. 통제와 보호를 같은 것으로 착각했다. 그래서 아들은 더 멀리 달아났다. 통제할수록, 아들은 더 요란하게 무너졌다.
사건은 항상 사소한 일로 시작했다. 술자리의 말다툼, 밤거리의 과한 장난, 누군가의 자존심을 밟는 한 마디. 그리고 그 사소한 일은 늘 “비용”으로 마무리되었다. 비서실이 움직였고, 법무팀이 움직였고, 누군가의 통장에 숫자가 들어갔다. 그 과정에서 정작 ‘사람’은 지워졌다. 피해자도, 가해자도, 아들도, 아버지도. 남는 것은 금액과 문서뿐이었다.
그가 가장 두려워한 것은 ‘세상’이 아니었다. 세상은 돈으로 잠시 조용해질 수 있었다. 그가 두려워한 것은 ‘아들의 눈’이었다. 그 눈이 언젠가 완전히 굳어버릴까 봐, 아무것도 반사하지 못하는 검은 유리처럼 될까 봐.
그날도 비슷했다. 대리운전 기사에게 무례하게 굴었다는 소문. 술김에 어디에 전화를 했다는 얘기. 누군가의 사진이 돌았다는 말. 비서실장에게 들어온 보고는 늘 “조치 가능”이라는 결론으로 끝났다. 그러나 회장의 가슴은 조치되지 않았다. 그의 가슴만은 늘 미처리 상태였다.
그는 새벽에 혼자 식탁에 앉았다. 아내가 오래전에 쓰던 머그컵이 아직 거기 있었다. 아내는 더 이상 그 집에 살지 않았다. ‘별거’라는 단어는 가족에게 쉽게 붙는 단어가 아니다. 그 단어는 조용히 집 안의 문들을 바꿔놓는다. 닫혀야 할 문이 열리고, 열려야 할 문이 닫힌다. 아내는 말없이 떠났고, 그는 붙잡지 않았다. 아니, 붙잡지 못했다. 붙잡는 순간, 자신이 지켜온 세계가 무너질 것 같아서였다. 그가 지켜온 세계란, 체면과 권위와 ‘흠 없는 가문’이라는 얇은 종이였다.
아내는 마지막에 이런 말을 남겼다.
“당신은 회장님으로는 완벽한데, 아버지로는 너무 늦어.”
그 말은 칼 같았다. 부러지지 않고, 무뎌지지 않는 칼. 그는 그 말이 거짓이 아니란 걸 안다. 다만, 늦었다고 해서 끝은 아니길 바랐다. 늦었다고 해서, 아들이 영영 돌아오지 않기를 바라지 않았다.
아들이 대학을 들어갔을 때, 그는 축하연을 열었다. 유명한 호텔에서 유명한 사람들을 불렀다. 기자도 왔고, 정치인도 왔고, 재계 인사도 왔다. 그 자리에서 그는 아들의 어깨를 두드리며 말했다.
“우리 아들, 이제부터 시작이다.”
그 말은 자연스러웠다. 그러나 아들은 그 말의 의미를 다르게 받아들였다. ‘시작’이란 책임의 시작이 아니라, 특권의 시작으로.
아들은 친구들을 ‘사람’으로 보지 않았다. 친구들은 선택이 아니라 장식이었다. 함께 있으면 자신이 더 강해 보이는 사람들, 자신의 심심함을 덜어주는 사람들, 자신의 욕망을 대신 실행해주는 사람들. 그렇게 관계는 거래가 되었다. 거래가 되면, 마음은 남지 않는다. 마음이 남지 않으면, 죄책감도 남지 않는다. 죄책감이 없으면, 한계가 없다.
회장은 그걸 모르지 않았다. 그는 아들이 어릴 때부터 “과하게” 비싼 것을 쉽게 얻는 모습을 몇 번이나 보았다. 갖고 싶다고 말하기도 전에 갖게 해주었다. 울기 전에 웃게 해주었다. 세상이 아들에게 상처를 줄까 봐, 세상과 아들 사이에 자신이 벽이 되었다. 그러나 벽이 되면, 바람도 막힌다. 바람이 막히면, 숨이 막힌다. 아들은 숨이 막혀서, 더 과격하게 뛰쳐나갔다.
어느 날, 회장은 아들의 휴대전화 메시지를 우연히 보게 되었다. 무심코 열린 화면에 찍힌 문장들이, 그를 얼어붙게 만들었다. 타인을 낮추는 말, 돈으로 해결하겠다는 말, 조롱과 비웃음. 그 문장들은 ‘악’이라기보다 ‘공허’였다. 악은 목적이라도 있다. 그러나 공허는 아무것도 없다. 아들의 문장엔 아무것도 없었다. 사람을 대하는 마음이 없었다. 삶을 대하는 무게가 없었다.
그는 그 자리에서 아들을 불렀다. 크게 소리치지 않았다. 회장은 소리를 크게 칠 필요가 없었다. 그는 늘 조용히 말해도 사람들이 움직였다. 그러나 아들은 움직이지 않았다. 아들은 웃었다. 그 웃음은 가볍고, 무례하고, 이상하게도 슬펐다.
“아버지, 이 정도로 흔들리면 회사는 어떻게 지켜요?”
아들의 말은 농담 같았지만, 회장의 속을 꿰뚫었다. 아들은 ‘회사’라는 단어를 가장 안전한 방패로 썼다. 아버지가 회사에 약하다는 걸 알고 있었다.
회장은 그날 처음으로 깨달았다. 자신이 아들에게 준 것들은 모두 ‘무기’가 되었다는 것을. 돈도, 사람도, 회사도, 심지어 ‘아버지의 체면’도 아들의 무기가 되었다. 아들은 그 무기들로 세상을 찔렀고, 세상은 피를 흘리며 뒤로 물러섰다. 그리고 그 피는 결국, 아버지의 발밑으로 흘러와 고였다.
그가 두려워한 것은 스캔들이 아니라, ‘습관’이었다. 한번 넘어간 선은 다음엔 더 쉽게 넘어진다. 그 선을 돈으로 다시 그어주는 순간, 선은 더 얇아진다.
그는 결단을 내리려 했다. 어떤 결단? 회사의 결단은 익숙했다. 하지만 가족의 결단은 달랐다. 가족의 결단은 누구도 대신해주지 않는다. 법무팀도, 비서실도, 홍보실도 대신해주지 않는다. 아버지라는 자리의 고독이, 그제야 그의 어깨에 정확히 앉았다. 그 무게는, 수조 원의 투자 판단보다 무거웠다.
그는 아들에게 말했다.
“이제는 네가 책임을 져야 한다.”
아들은 고개를 끄덕이는 듯했지만, 눈빛은 여전히 떠 있었다.
“책임? 그럼 나 감옥 보내요?”
아들이 웃으며 말했다. 회장은 그 웃음을 보며, 심장이 땅으로 떨어지는 느낌을 받았다. 아들은 '죄'가 아니라 ‘처벌’을 두려워했다. 그 차이가, 모든 것을 설명했다.
며칠 뒤, 회장은 오랜 친구를 만났다. 같은 시절을 지나온, 그러나 다른 방식으로 늙어간 사람. 친구는 작은 재단을 운영하고 있었고, 기업가보다는 교육자에 가까운 얼굴을 하고 있었다. 회장은 그 친구에게 처음으로 “아들이 무섭다”고 말했다. 말로 내뱉는 순간, 자존심이 무너지는 소리가 났다. 그러나 동시에, 숨이 조금 쉬어졌다.
친구는 긴 침묵 끝에 물었다.
“너는 아들이 언제부터 그렇게 됐다고 생각하냐.”
회장은 답하지 못했다. ‘언제부터’는 하나의 날짜가 아니었다. 그것은 수천 번의 방치, 수천 번의 합의, 수천 번의 침묵의 합이었다. 친구는 다시 말했다.
“아들이 그렇게 된 건, 네가 아버지를 그만두어서가 아니라, 아버지를 ‘회장 방식’으로 했기 때문이야.”
회장은 반박하고 싶었다. 자신의 방식이 틀렸다고 인정하면, 자신의 인생 절반이 틀렸다고 인정해야 하는 것 같았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는 반박하지 않았다. 그는 그날 유난히 피곤했고, 피곤함이 그의 방어를 무너뜨렸다. 친구는 마지막으로 이렇게 말했다.
“너는 아들을 망치지 않으려고 돈을 썼는데, 그 돈이 아들의 인생을 대신 살아줬어. 인생을 대신 살아주면, 아이는 커지지 못해.”
그날 밤, 회장은 오래된 서랍을 열었다. 거기엔 아들의 초등학교 때 사진이 있었다. 운동장에서 땀에 젖은 채 웃고 있는 아이. 손에 쥔 건 작은 상장. ‘성실상’이라는 글자가 보였다. 그는 그 사진을 오래 바라보았다. 그 아이는 어디로 갔을까. 그 아이를 어디서부터 놓쳤을까. 사진은 대답하지 않았고, 사진의 침묵은 오히려 잔인했다.
회장은 결심했다. 더 이상 ‘조치’로 끝내지 않겠다고. 더 이상 ‘합의’로 매듭짓지 않겠다고. 그 결심은 멋진 선언이 아니었다. 오히려 무서운 선언이었다. 아들의 인생에서 자신이 빼앗아온 “현실”을, 다시 돌려놓는 일. 그 현실은 차갑고 아프고, 때로는 부끄럽다. 그러나 그 현실만이 사람을 자라게 한다는 것을, 그는 늦게 배웠다.
그는 아들의 카드 사용 한도를 줄였다. 운전기사를 붙이지 않았다. 경호도 최소로 했다. 사람들이 보기엔 소박한 변화였지만, 아들에겐 폭력처럼 느껴질 만큼 큰 변화였다. 아들은 난리를 쳤다. 비서실로 전화를 돌리고, 임원들에게 소리치고, 아버지의 지인들에게까지 연락했다. 그러나 이번엔 아무도 움직이지 않았다. 회장이 이미 “움직이지 말라”고 지시했기 때문이다.
그 밤, 아들은 집으로 돌아와 문을 쾅 닫고 소리쳤다.
“아버지 지금 나 망신 주는 거야?”
회장은 거실에서 일어나지 않았다. 그는 한참을 침묵하다가 말했다.
“망신은 밖에서 당하는 게 아니라, 안에서 쌓이는 거다.”
아들은 비웃었다.
“그 말, 누구한테 배웠어? 책에서?”
회장은 흔들리려다가, 자신의 손가락 끝에 힘을 주었다. 그 힘은 회장으로서의 힘이 아니라, 아버지로서의 힘이었다. 느리고, 떨리고, 그러나 이번엔 피하지 않는 힘.
처음으로 그는 ‘기다림’을 선택했다. 해결이 아니라, 성장의 시간을 기다리는 것. 그 기다림은 그에게도 고통이었다.
며칠 뒤, 아들은 밖에서 사고를 치고도 스스로 해결하지 못했다. 예전 같으면 전화 한 통이면 끝났을 일. 하지만 이번엔 전화가 닿아도, 돌아오는 말이 없었다. 아들은 처음으로 “막막함”을 겪었다. 막막함은 인간을 겸손하게 만들기도 하고, 더 날카롭게 만들기도 한다. 아들은 더 날카로워졌다. 그는 아버지를 찾아가 소리쳤다.
“왜 이렇게까지 해?”
회장은 조용히 답했다.
“네가 너를 만나게 하려고.”
아들은 이해하지 못했다. ‘나를 만난다’는 말은, 돈으로 사는 물건이 아니었다. 관계가 무너지기 시작할 때, 사람은 그제야 자신과 마주한다. 그는 그동안 자신과 마주하지 않도록 많은 사람들이 길을 비켜줬다. 그 길이 이제 막혔다. 아들은 길을 잃었다.
그때, 뜻밖의 사람이 나타났다. 아들의 어릴 적 가정교사였던 여성. 오래전에 그 집을 떠났던 사람. 회장은 그녀에게 연락했다. 돈으로 부탁한 것이 아니라, 진심으로 부탁했다.
“한 번만… 우리 아이를 봐줄 수 있겠나.”
그녀는 망설였지만, 결국 만났다. 그리고 아들에게 말했다.
“너는 똑똑해. 그런데 너는 너보다 약한 사람을 보면, 왜 그렇게까지 하니.”
아들은 대답하지 못했다. 대답하지 못하는 순간이, 첫 번째 균열이었다.
회장은 그 대화를 멀리서 지켜보지 않았다. 그는 이번엔 관찰자가 되지 않기로 했다. 대신, 기록자가 되기로 했다. 그날 밤 그는 노트에 적었다. ‘나는 무엇을 두려워했나.’ ‘나는 무엇을 지키려 했나.’ ‘나는 무엇을 놓쳤나.’ 글씨는 흔들렸고, 문장은 짧았다. 그러나 짧은 문장에는 긴 세월이 들어 있었다.
그는 자신이 가장 두려워했던 것이 “가문의 흠”이 아니라 “아들의 실패”였다는 걸 깨달았다. 실패를 두려워하면, 실패를 막기 위해 모든 것을 대신해주게 된다. 대신해주는 순간, 아이는 실패를 배우지 못한다. 실패를 배우지 못하면, 책임도 배우지 못한다. 책임을 배우지 못하면, 사람도 배우지 못한다. 그 연쇄가 이제야 보였다. 너무 늦게 보였지만, 보였다는 사실이 중요했다.
시간은 느리게 흘렀다. 변화는 극적이지 않았다. 드라마처럼 한 사건으로 사람이 바뀌지 않았다. 오히려 작은 부끄러움들이 쌓여, 아들의 마음에 조금씩 균열을 냈다. 처음으로 누군가에게 직접 사과하는 경험. 처음으로 거절당하는 경험. 처음으로 “네가 잘못했다”는 말을 돈이 아니라 사람의 눈 앞에서 듣는 경험. 아들은 그 경험들을 견디지 못해 몇 번이나 도망치려 했다. 그러나 도망칠 때마다, 예전의 문이 열리지 않았다.
회장은 때때로 흔들렸다. 아들의 고통을 보면, 다시 예전처럼 해결해주고 싶었다. 한 번만, 이번 한 번만. 그런 유혹이 매일 왔다. 그러나 그는 자신에게도 같은 말을 했다.
“이번 한 번만이, 지난 십 년을 만들었다.”
그는 버텼다. 버틴다는 것은 사랑의 방식이기도 했다. 그 사랑은 부드럽지 않았다. 부드럽지 않은 사랑이 가능하다는 걸, 그는 그제야 배웠다.
어느 날, 아들은 아버지에게 물었다.
“아버지는… 나를 사랑해?”
그 질문은 뜬금없었지만, 사실 가장 핵심이었다. 회장은 숨이 멎는 줄 알았다. 그 질문 속에는, 아들의 어린 시절이 들어 있었다. 사랑을 확인받고 싶었던 아이. 그러나 사랑을 확인받기 위해선, 사랑이 무엇인지 알아야 한다. 아들은 사랑을 특권과 혼동했다. 회장은 그 혼동을 자신이 만들었다는 걸 알았다.
그는 대답했다.
“사랑한다.”
그리고 한 박자 쉬었다.
“그래서 너를 편하게 해주지 않으려고 한다.”
아들은 멍하니 아버지를 바라봤다. 그 눈빛엔 오랜만에 진짜 감정이 있었다. 분노도, 조롱도 아닌 감정. 이해하려는 감정. 아들은 조용히 말했다.
“그럼… 나는 어떻게 해야 해?”
그 질문은, 시작이었다. ‘어떻게 해야 해’라는 말은, 처음으로 책임의 문 앞에 선 사람의 말이다. 회장은 그 질문이 나오기까지 너무 오래 걸렸다는 사실에 가슴이 저렸지만, 동시에 그 질문이 나왔다는 사실에 눈이 뜨거워졌다. 그는 말해주고 싶었다. 정답을 알려주고 싶었다. 그러나 그는 이번엔 정답을 말하지 않았다. 대신 방법을 말했다.
“먼저, 네가 망가뜨린 관계들을 하나씩 다시 보자. 시간이 걸릴 거다. 부끄러울 거다. 그래도 해야 한다.”
아들은 고개를 끄덕였다. 아주 작게. 그 작은 끄덕임이, 회장에게는 어떤 투자 성과보다 값졌다. 그러나 그는 알았다. 이건 해피엔딩이 아니라, 긴 여정의 첫 장일 뿐이라는 걸. 사람은 한 번에 바뀌지 않는다. 특히 특권 속에서 자란 사람은 더 오래 걸린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걸리더라도 가는 것’이 중요했다.
회장은 그날 새벽, 처음으로 아들의 방 문 앞에서 멈춰 섰다. 문을 열지 않았다. 노크도 하지 않았다. 다만 그 문이 닫혀 있다는 사실을 확인했다. 닫힌 문은, 완전히 무너진 관계의 증거가 아니라, 아직 살아있는 관계의 경계였다. 경계가 있다는 건, 아직 서로를 포기하지 않았다는 뜻일 수도 있었다.
그는 천천히 돌아서서 자신의 방으로 갔다. 침대 옆에 오래된 사진 하나를 세워두었다. 아들이 어린 시절 자신과 손을 잡고 웃던 사진. 그 사진 속 그는 회장이 아니었다. 그는 아버지였다. 그리고 그때의 자신이, 지금의 자신에게 조용히 말하는 것 같았다.
“너는 다시 해볼 수 있어.”
아들의 변화는 앞으로도 흔들릴 것이다. 다시 도망칠 수도 있고, 다시 무너질 수도 있다. 그러나 이번엔 다르다. 이번엔 아버지가 ‘돈’이 아니라 ‘존재’로 옆에 있다. 사람을 대신해주지 않고, 사람을 사람으로 만들기 위해 곁에 서는 존재로. 그것은 회장이 익숙한 방식이 아니었다. 그래서 더 어렵고, 그래서 더 진짜였다.
그리고 회장은 비로소 알았다. 재벌의 세계에서 가장 값비싼 것은 기업이 아니라, 시간이라는 것을. 특히 가족에게 돌아갈 시간. 그 시간을 그는 너무 많이 놓쳤고, 너무 늦게 되찾기 시작했다. 하지만 늦었다고 해서 모두 끝은 아니었다. 늦었다는 것은, 지금부터 더 정직해져야 한다는 뜻이었다. 그는 정직해지기로 했다. 아들 앞에서, 그리고 자기 자신 앞에서.
창밖의 빛은 여전히 도심을 채웠다. 그러나 그 빛이 오늘은 조금 달랐다. 차갑기만 했던 빛이, 아주 얇게 따뜻해 보였다. 그는 그 착각을 붙잡았다. 착각이라도 괜찮았다. 사람은 때로 착각을 통해 다시 걷는다. 그리고 걷다 보면, 착각이 진실이 되는 날도 온다. 그가 바라는 것은 단 하나였다. 언젠가 아들이 자신의 이름을, 회장이 아닌 ‘아버지’로 불러주는 날. 그날이 오면, 그는 비로소 자신이 가진 모든 것 중 가장 큰 것을 되찾았다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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