코로나로 망해서 컵라면 먹던 30대, '비누 거품' 하나로 인생 역전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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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코로나19라는 긴 터널을 지나며 나락으로 떨어졌다가, 비누 거품 속에서 다시 희망을 쏘아 올린 한 청년의 인생 역전 드라마를 작성해 드립니다. MZ세대의 감각과 끈기로 세차장 사장님이 된 주인공의 이야기를 생생하게 담았습니다. 마스크 뒤에 감춰진 눈물, 그리고 비누 거품 안녕하세요,  여러분.  오늘은 코로나19가 할퀴고 간 상처를 딛고 일어선, 우리 주변의 청년 이야기를 들려드리려 합니다. 한때는 잘나가는 스타트업 대표를 꿈꿨으나, 바이러스라는 불가항력 앞에 모든 것을 잃고 신용불량자 직전까지 몰렸던 31세 청년 '준호' 씨의 이야기입니다.  그의 손이 거친 타이어를 만지며 어떻게 다시 빛나게 되었는지, 그 치열했던 3년의 기록을 시작합니다. 화려했던 오픈, 그리고 예고 없던 폐업 통보 2019년 겨울, 준호 씨는 부모님의 도움과 대출을 끌어모아 홍대 인근에 퓨전 요리 주점을 열었습니다.  인스타그램 감성을 자극하는 인테리어와 독특한 메뉴 덕분에 오픈 초기에는 웨이팅이 생길 정도로 장사가 잘되었습니다. "나도 이제 영 앤 리치(Young & Rich)가 될 수 있겠다" 는 꿈에 부풀어 있었죠. 하지만 그 꿈은 단 3개월 만에 산산조각이 났습니다.  코로나19가 터졌고, 사회적 거리두기가 시작되었습니다. 저녁 9시 영업 제한, 5인 이상 집합 금지. 술장사를 하는 그에게는 사형 선고나 다름없었습니다. 월세 400만 원은 고스란히 빚이 되어 쌓였고, 아르바이트생들을 내보내고 혼자 주방을 지켰지만, 하루 매출 0원을 찍는 날이 늘어갔습니다.  결국 준호 씨는 1년 만에 권리금은커녕 원상복구 비용까지 빚을 지고 가게를 폐업해야 했습니다. 한순간에 떨어진 나락, 컵라면과 배달 대행 가게를 정리하고 남은 건 1억 원이 넘는 빚과 패배감뿐이었습니다. 준호 씨는 보증금을 뺀 돈으로 신림동의 2평 남짓한 고시원으로 거처를 옮겼습니다. 한때 '사장님' 소리를 듣던 그는 이제 배달 대행 오토바이를 타는 라이...

우리가 너무 빨리 어른이 되었을 때

우리가 너무 빨리 어른이 되었을 때
우리가 너무 빨리 어른이 되었을 때
첫사랑, 예상치 못한 임신, 이른 결혼. 불행과 행복이 같은 길에서 자라는 한 남자의 기록.
현실 성장 서사
늦은 밤 버스정류장, 가로등 아래 혼자 서 있는 청년의 뒷모습, 차가운 겨울 공기, 고퀄리티 실사풍, 보케, 광원, 16:9
— ‘결정의 밤’

나는 스무 살이 되어서야, 내가 어떤 사람인지 조금 알기 시작했다. 그전까지 나는 늘 “괜찮은 척”을 잘했다. 성적도, 아르바이트도, 친구 관계도 어딘가 중간쯤에서 적당히 버티면 되는 줄 알았다. 그런데 어떤 날은, 인생이 중간을 허락하지 않았다. 그날 이후로 내 시간은 늘 “지금 당장”으로 바뀌었다.

그 애를 처음 본 건 대학교 신입생 OT였다. 세련된 말투도 아니고, 과하게 웃지도 않는데도 자꾸 눈이 갔다. 이름을 부르기 전에도 이미 마음이 먼저 움직였고, 그게 참 무서웠다. 누군가를 좋아한다는 감정은 달콤하지만, 동시에 나를 어딘가로 떠밀었다. 나는 늘 계획대로 사는 편이 아니었지만, 사랑 앞에서는 더 서툴렀다.

우리는 빠르게 가까워졌다. 시험 기간에는 도서관 창가 자리에서 서로의 손가락에 굳은살을 만지며

“어쩌다 이렇게 열심히 살게 됐냐”

고 웃었다. 편의점 삼각김밥을 나눠 먹으며, 미래가 너무 멀어 보인다고 말했다. 그때의 나는, 멀다는 것이 곧 안전함이라고 생각했다. 미래는 멀리 있을수록 상처를 주지 않는다고.

하지만 사랑은 늘 현재형이었다. 지금 안아주지 않으면, 지금 말하지 않으면, 지금 결정하지 않으면… 다음은 없을 수 있다는 것을 나는 너무 늦게 배웠다.

그날 밤, 우리는 서로의 불안과 외로움을 오래 이야기했다.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침묵이 길어졌고, 그 침묵이 우리를 같은 쪽으로 기울게 했다. 내가 여기서 분명히 말하고 싶은 건, 그 이후의 장면이 아니다. 중요한 건 “그 다음 날”이었다. 아무 일도 아닌 듯 학교를 가고, 아무 일도 아닌 듯 커피를 마시고, 아무 일도 아닌 듯 웃었지만, 그 얇은 일상 아래에는 이미 조용한 파도가 출렁이고 있었다.

두 달쯤 지나, 그녀가 내 앞에 앉아 말을 꺼냈다. 손끝이 떨렸고, 눈동자가 자꾸 바닥으로 향했다.

“나… 혹시…”

그 말이 끝나기도 전에 내 심장은 이미 결론을 알고 있었다. 나는 괜찮은 척을 했고, 그녀는 미안한 척을 했지만, 사실 우리는 둘 다 무너지고 있었다.

병원 대기실의 차가운 조명, 손에 쥔 서류와 떨리는 손끝, 고퀄리티 실사풍, 보케, 광원, 16:9
— ‘차가운 대기실’

검사 결과지를 접는 소리, 의사의 말투, 대기실의 공기, 자동문이 열릴 때마다 들어오는 소독약 냄새. 그 모든 게 내 뇌에 박혔다. 그날 이후로 내 세상은 “가능성”이 아니라 “현실”로만 움직였다. 현실은 잔인했다. 현실은 우리에게 질문을 던지지 않았다. 현실은 고지서처럼, 기한이 적힌 종이처럼, 선택을 요구했다.

우리는 먼저 서로의 부모에게 말했다. 나는 아버지 앞에서 목소리가 자꾸 작아졌다. 아버지는 말을 길게 하지 않았다. 그 침묵이 오히려 더 무서웠다. 그녀의 집은 더 복잡했다. 어머니의 울음과 아버지의 분노, 그리고 그 사이에서 그녀가 작아지는 모습이 내게는 벌처럼 남았다. 나는 “내가 책임질게요”를 수십 번 되뇌었지만, 그 말이 현실을 당장 바꾸지는 못했다.

결혼을 결정한 건 사랑만 때문은 아니었다. 솔직히 말하면, 두려움이 컸다. 우리가 도망치지 않겠다는 의지, 아이를 혼자 두지 않겠다는 약속, 서로에게 끝까지 남아보겠다는 무모한 용기. 그 모든 것이 섞였다. 결혼식은 화려하지 않았다. 우리는 축복보다 걱정을 더 많이 받았다. 축복은 짧았고, 걱정은 길었다.

불행은 큰 사건으로 오지 않았다. 불행은 작은 것들이 쌓여서 왔다. 하루하루가 빡빡해지면서, 우리의 말투가 거칠어졌다. 돈은 늘 모자랐다. 아르바이트 시간을 늘리면 수업이 흔들렸고, 수업을 지키면 월세가 흔들렸다. 새벽 배송 상하차는 내 허리를 부러뜨릴 듯했고, 편의점 야간 근무는 내 표정을 지워버렸다.

그녀는 몸이 힘들었고 마음이 더 힘들었다. 나는 그녀의 힘듦을 이해한다고 말했지만, 사실은 이해보다 “해결”을 먼저 찾았다.

“돈을 벌면 괜찮아질 거야.”

그 말은 참 편했다. 돈은 숫자였고, 숫자는 계산하면 됐다. 하지만 감정은 숫자가 아니었다. 감정은 밤에 찾아와서, 아무 소리 없이 사람을 무너뜨렸다.

그때의 나는 ‘좋은 남편’이 되려고 했지만, 정작 ‘좋은 사람’이 되는 법은 몰랐다. 책임감이 사랑을 대신할 수 있다고 착각했다.

작은 원룸의 밤, 식탁 위에 쌓인 고지서와 계산기, 창밖의 빗방울, 고퀄리티 실사풍, 보케, 광원, 16:9
— ‘고지서의 계절’

아이가 태어났다. 그 작은 손가락이 내 손을 잡았을 때, 나는 숨이 막혔다. 기쁨도 있었고 공포도 있었다. 내가 이 생명을 지킬 수 있을까. 내가 이 사람들의 울타리가 될 수 있을까. 그 질문이 목구멍에 걸렸다. 아이의 울음은 우렁찼고, 우리의 잠은 잘게 쪼개졌다. 우리는 서로의 얼굴을 자주 놓쳤다. 같은 집에 살면서도, 서로의 마음에는 자주 들어가지 못했다.

갈등은 일상적이었다.

“왜 이렇게 늦었어.”

“나도 어쩔 수 없었어.”

“당신은 늘 어쩔 수 없대.”

“당신은 늘 나만 탓해.”

말은 칼이 됐다. 우린 칼을 휘두르면서도, 칼을 쥔 손이 서로였다는 걸 잊었다. 그러다 어느 날, 그녀가 조용히 말했다.

“나… 나 없어져도 될까 봐 무서워.”

그 말 한 줄이 내 머리를 깨뜨렸다. 그동안 나는 ‘가족을 지키는’ 일을 하느라 바쁘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정작 그 가족 안의 사람을 놓치고 있었다. 나는 그날 처음으로 “미안해”를 똑바로 말했다. 변명 없이, 해결책 없이, 그냥 미안하다고. 그리고 처음으로 함께 도움을 받기로 했다. 상담센터 문을 열 때, 나는 내가 약해지는 줄 알았다. 하지만 그건 약해지는 게 아니라, 무너지는 방향을 바꾸는 일이었다.

우리의 행복은 드라마처럼 반전으로 오지 않았다. 행복도 역시 작은 것들이 쌓여서 왔다. 아이가 이유식을 처음 먹고 웃었을 때. 새벽에 그녀가 잠든 얼굴로 “고마워”라고 중얼거렸을 때. 내가 월세를 제때 냈다는 사실 하나로 한숨을 놓았을 때. 누군가에게는 하찮은 일들이, 우리에게는 살아있다는 증거였다.

나는 학교를 완전히 포기하지 않기로 했다. 오래 걸리더라도, 돌아가더라도, 끝까지 가보기로 했다. 낮에는 일을 하고, 밤에는 수업 자료를 읽었다. 아이가 잠들면, 키보드 소리를 최대한 죽이고 리포트를 썼다. 가끔은 눈물이 났다. 억울해서가 아니라, 내가 너무 늦게 철이 든 것 같아서. 그녀도 마찬가지였다. 그녀는 몸을 회복한 뒤 온라인으로 자격증 공부를 시작했다. 우리는 더 이상 “버티기”만 하는 부부가 아니라, “살아내기”를 같이 연습하는 팀이 됐다.

노트북 앞에서 공부하는 청년, 따뜻한 스탠드 조명, 조용한 새벽의 공기, 고퀄리티 실사풍, 보케, 광원, 16:9
— ‘새벽의 연습’

물론 불행은 중간중간 다시 찾아왔다. 아이가 아프면 병원비가 무섭게 느껴졌고, 친척들의 말은 여전히 부담이 됐다.

“아직 애인데…”

“너희 너무 빨랐지.”

“그래도 책임졌으니 다행이야.”

다행이라는 말은 때때로 칭찬이 아니라, ‘원래는 망했어야 할 상황’이라는 전제를 품고 있었다. 그 말이 싫었지만, 우리는 그 말들로부터 조금씩 거리를 두는 법을 배웠다.

나는 아이 앞에서 어른인 척하는 대신, 솔직한 어른이 되려고 했다. 실수했다고 말할 줄 아는 사람, 두려워도 도망치지 않는 사람, 사랑을 “의무”로만 만들지 않는 사람. 그녀도 나도 완벽하지 않았다. 완벽 대신 우리는 “계속”을 택했다. 계속 대화하고, 계속 사과하고, 계속 웃으려 애썼다.

행복은 ‘문제 없는 삶’이 아니었다. 행복은 문제가 있어도 손을 놓지 않는 방식이었다.

몇 년이 지나, 우리 집은 예전보다 넓어지지 않았다. 하지만 숨 쉴 공간은 더 많아졌다. 우리는 서로의 침묵을 겁내지 않았고, 필요한 때는 손을 먼저 내밀었다. 아이는 어느 날 내 손을 잡고 말했다.

“아빠, 오늘은 내가 아빠 재우는 날이야.”

그 말에 나는 웃다가 울었다. 내가 어른이 된 이유가, 지금 눈앞에 있었다.

내 첫사랑은 이제 ‘첫사랑’이라는 단어보다 더 많은 이름을 가졌다. 아내, 동료, 친구, 그리고 내 삶의 증인. 우리는 처음부터 현명하지 않았다. 우리는 실수로 시작했고, 두려움으로 결정을 했고, 서로를 상처 내면서도 결국 서로에게 돌아왔다. 그게 우리 방식의 성장이라면, 나는 그 성장에 책임을 지고 싶었다. 책임이 벌이 아니라, 약속이 되도록.

가끔 나는 스무 살의 나를 떠올린다. 버스정류장에 서서, 가로등 아래서, 세상이 끝난 것처럼 떨던 나. 그때 누군가가 말해줬으면 좋겠다. “끝난 게 아니라, 시작이 좀 거칠 뿐”이라고. 인생은 가끔 너무 빠르게 어른이 되게 하지만, 그래도 어른은 배울 수 있다고. 늦게라도 사랑하는 법을, 지키는 법을, 그리고 다시 웃는 법을.

불행한 일들은 분명 있었다. 우리가 놓친 시간도, 울어버린 밤도, 마음이 멀어진 순간도 있었다. 하지만 행복한 삶도 분명 있었다. 아이의 웃음, 서로의 손, 그리고 다시 시작할 수 있다는 감각. 그 모든 것이 함께였기에, 나는 이 이야기를 ‘불행’으로만 부르지 못한다.

나는 아직도 자주 부족하다. 하지만 오늘도 퇴근길에 작은 장난감 하나를 사 들고 집으로 간다. 문을 열면 아이가 달려오고, 그녀가 “수고했어”라고 말한다. 그 순간 나는 안다. 우리가 너무 빨리 어른이 되었어도, 우리는 결국 어른이 되었다는 것을. 그리고 그 어른은, 사랑을 아직도 배우는 중이라는 것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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