코로나로 망해서 컵라면 먹던 30대, '비누 거품' 하나로 인생 역전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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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코로나19라는 긴 터널을 지나며 나락으로 떨어졌다가, 비누 거품 속에서 다시 희망을 쏘아 올린 한 청년의 인생 역전 드라마를 작성해 드립니다. MZ세대의 감각과 끈기로 세차장 사장님이 된 주인공의 이야기를 생생하게 담았습니다. 마스크 뒤에 감춰진 눈물, 그리고 비누 거품 안녕하세요,  여러분.  오늘은 코로나19가 할퀴고 간 상처를 딛고 일어선, 우리 주변의 청년 이야기를 들려드리려 합니다. 한때는 잘나가는 스타트업 대표를 꿈꿨으나, 바이러스라는 불가항력 앞에 모든 것을 잃고 신용불량자 직전까지 몰렸던 31세 청년 '준호' 씨의 이야기입니다.  그의 손이 거친 타이어를 만지며 어떻게 다시 빛나게 되었는지, 그 치열했던 3년의 기록을 시작합니다. 화려했던 오픈, 그리고 예고 없던 폐업 통보 2019년 겨울, 준호 씨는 부모님의 도움과 대출을 끌어모아 홍대 인근에 퓨전 요리 주점을 열었습니다.  인스타그램 감성을 자극하는 인테리어와 독특한 메뉴 덕분에 오픈 초기에는 웨이팅이 생길 정도로 장사가 잘되었습니다. "나도 이제 영 앤 리치(Young & Rich)가 될 수 있겠다" 는 꿈에 부풀어 있었죠. 하지만 그 꿈은 단 3개월 만에 산산조각이 났습니다.  코로나19가 터졌고, 사회적 거리두기가 시작되었습니다. 저녁 9시 영업 제한, 5인 이상 집합 금지. 술장사를 하는 그에게는 사형 선고나 다름없었습니다. 월세 400만 원은 고스란히 빚이 되어 쌓였고, 아르바이트생들을 내보내고 혼자 주방을 지켰지만, 하루 매출 0원을 찍는 날이 늘어갔습니다.  결국 준호 씨는 1년 만에 권리금은커녕 원상복구 비용까지 빚을 지고 가게를 폐업해야 했습니다. 한순간에 떨어진 나락, 컵라면과 배달 대행 가게를 정리하고 남은 건 1억 원이 넘는 빚과 패배감뿐이었습니다. 준호 씨는 보증금을 뺀 돈으로 신림동의 2평 남짓한 고시원으로 거처를 옮겼습니다. 한때 '사장님' 소리를 듣던 그는 이제 배달 대행 오토바이를 타는 라이...

황등의 까마귀

황등의 까마귀

황등의 까마귀

익산 황등, 겨울 들판과 전신주 위로 검은 점들이 번져가던 날. 한 청년이 처음으로 ‘너무 많은 까마귀’를 목격한다.

현실속 이야기 겨울 평야 낯선 군무 조용한 결말

그가 황등으로 향한 건 대단한 이유가 있어서가 아니었다. 대단하지 않은 이유들, 그러니까 누군가의 인생을 진짜로 움직이는 건 늘 그런 것들이었다. 전주에서 자취방을 정리하던 와중, 구직 사이트에서 마지막으로 눌러본 공고 하나가 익산에 있었다. 면접 날짜가 잡히기까지 사흘. 그는 ‘어차피 내려갈 거면 미리 가서 공기라도 바꾸자’고 생각했다.

청년의 이름은 재윤이었다. 스물아홉. 대학을 졸업하고 도시에서 빌려 살던 몇 년이, 누군가에겐 한 장의 이력서로 요약되는 시간이었다. 그는 그 요약된 시간 속에서 자꾸만 “부족함”이라는 단어를 봤다. 경력 부족, 자격 부족, 실무 부족. 부족하다는 말은 사람을 얇게 만들었다. 얇아진 사람은 어디서든 바람이 들었다. 그 바람이 들지 않는 곳을 찾는 일, 어쩌면 그게 이번 황등행의 진짜 이유였다.

버스는 익산 시내를 지나 황등으로 접어들었다. 창밖이 넓어지면 사람 마음도 넓어진다고들 했지만, 재윤은 그 반대를 경험했다. 넓어진 건 창밖뿐이었고, 마음은 오히려 더 조여왔다. 논과 밭이 한꺼번에 펼쳐지고, 멀리 낮은 산이 선을 그었다. 그 위로 겨울 하늘이 얇게 깔렸다. 눈은 없었고, 바람은 있었다.

그는 버스 맨 뒤 좌석에 앉아, 이어폰을 귀에 꽂은 채로도 음악을 제대로 듣지 못했다. 음악이 들리면 머릿속에서 다른 소리가 더 커졌다. 면접장에 들어서던 장면, ‘혹시 연락드리겠습니다’라는 말의 결말, 그리고 그 결말의 반복. 그래서 재윤은 이어폰을 뽑고 창밖만 보았다.

그때였다. 전신주 하나가 툭, 검은 점으로 채워져 있는 게 보였다. 마치 누가 검은 구슬을 촘촘히 올려놓은 것처럼. 재윤은 순간 눈을 찌푸렸다. 까치인가 싶었다. 하지만 점들은 너무 많았다. 그리고 지나가는 속도에도 불구하고, 점들의 모양이 까치보다는 더 묵직했다.

버스가 조금 더 가자 전신주가 또 나왔다. 이번엔 가로수 위였다. 점들이 나뭇가지마다 매달려 있었다. 그냥 앉아 있는 게 아니라, 서로 자리를 비켜주기도 하고 어깨를 부딪치기도 하는, 아주 ‘살아 있는’ 점들이었다. 재윤은 그제야 그 점들이 까마귀라는 걸 알아차렸다.

겨울 평야와 전신주에 모여드는 새들을 떠올리게 하는 랜덤 이미지

그는 어릴 때도 까마귀를 본 적이 있었다. 도심 공원 한쪽, 쓰레기통 근처, 아니면 학교 운동장 옆 전깃줄 위. 하지만 그런 까마귀는 ‘한두 마리’였다. 황등의 까마귀는 한두가 아니었다. 수십이 아니었다. 숫자를 세려는 시도가 무색할 정도로, 까마귀는 풍경 그 자체였다.

버스 기사와 승객들은 아무렇지 않았다. 누구도 “저거 봐요”라고 하지 않았다. 까마귀는 그들에게 이미 오래된 배경음악처럼 일상이었고, 재윤에게만 새로웠다. 새로움은 늘 낯설고, 낯섦은 가끔 두려움과 닮았다.

재윤은 자신도 모르게 생각했다. ‘여기선 까마귀가 사람이구나.’

버스가 황등 터미널 근처에 멈췄을 때, 재윤은 짐을 들고 내리면서도 하늘을 올려다봤다. 하늘은 맑았는데, 하늘 아래가 어두웠다. 까마귀 떼가 저 멀리서 한 번에 일어나는 순간, 공기가 한 겹 더 두꺼워지는 것 같았다. 날갯짓은 소리보다 먼저 그림자를 만들었다.

재윤이 묵을 곳은 황등면 외곽의 작은 민박이었다. 지도 앱으로는 도보 15분. 실제로는 바람 때문에 25분처럼 느껴졌다. 길은 한산했고, 도로 옆의 밭은 겨울의 색으로 비워져 있었다. 마른 줄기들이 땅에 박혀 있고, 그 위로 까마귀 몇 마리가 툭툭 걸었다. 걸음걸이가 인간처럼 느긋했다.

민박 주인인 중년 여자는 재윤을 보자마자 “면접 보러 왔어요?”라고 물었다. 재윤이 “네”라고 답하자 여자는 “추운데 고생하네요”라고 말했는데, 그 말투에는 이상하게도 ‘추위’가 아니라 ‘까마귀’가 들어 있는 것 같았다. 재윤은 고개를 갸웃했지만, 무엇이 들어 있었는지 정확히 말할 수는 없었다.

여자는 방 열쇠를 건네며 말했다. “해 지면 밖에 오래 있지 마요. 소리가 좀 그래요.”

재윤은 “무슨 소리요?”라고 되물었다. 여자는 잠깐 머뭇거리다가 웃었다. “까마귀 소리요. 낯선 사람은 처음엔 잠을 설쳐요.”

재윤은 웃어야 할지, 고개를 끄덕여야 할지 몰라서 그냥 “아…” 하고 짧게 소리를 냈다. 여자는 그 짧은 소리를 알아듣고, 더 설명하지 않았다. 마을의 말투는 대개 그렇게 끝이 짧았다. 끝이 짧은 말 뒤에는, 설명할 필요 없는 풍경이 있었다.

겨울 저녁, 길가 가로수와 전신주가 어둑해지는 랜덤 이미지

짐을 풀고 창문을 열어보니 논에서 바람이 바로 들어왔다. 바람에는 흙냄새가 섞여 있었다. 그리고 멀리서 ‘까악’ 하는 소리가 들렸다. 그 소리는 생각보다 굵었다. 얇은 비명이라기보다는, 오래된 목소리 같았다. 한 마리가 울면, 다른 마리가 받았다. 둘이 아니었다. 셋이 아니었다. 소리는 금방 합창이 되었다.

재윤은 문득 도시에서 듣던 소리들을 떠올렸다. 지하철 문이 닫히는 소리, 신호등의 삐- 소리, 편의점 냉장고의 웅웅거림. 그 소리들은 사람에게 무관심했다. 황등의 까마귀 소리는 달랐다. 마치 누군가를 보고 울고 있는 것 같았다. 누군가가 지나갈 때마다, 누군가를 평가하는 것처럼.

그날 저녁, 재윤은 밖으로 나가지 않았다. 민박 주인의 말이 떠올랐다. ‘해 지면 밖에 오래 있지 마요.’ 그 말이 무서워서가 아니라, 설명할 수 없게 설득력 있어서였다. 재윤은 라면을 끓여 먹고, 휴대폰으로 면접 예상 질문을 다시 읽었다. 질문들은 익숙했지만, 답은 늘 새로 어려웠다. 그는 답을 적다가도 창밖 소리에 고개를 들었다.

밤이 깊어질수록 까마귀 소리는 조금씩 멀어졌다. 멀어졌다기보다, 위로 올라갔다. 어디선가 잠자리를 잡은 모양이었다. 재윤은 침대에 누워 천장을 보며 생각했다. ‘저것들은 어디에서 자지?’

그 질문은 곧 다른 질문으로 바뀌었다. ‘저것들은 왜 저렇게 많이 모였지?’

아침에 눈을 뜨자, 방 안은 조용했다. 재윤은 잠을 깊게 자지 못했다고 느꼈지만, 그래도 눈을 뜰 수 있었으니 괜찮다고 생각했다. 창밖을 보니 하늘이 파랬다. 어제의 어둠이 거짓말처럼 가벼웠다.

그는 편의점 대신 동네 슈퍼를 찾아 나섰다. 황등의 슈퍼는 ‘슈퍼’라는 말보다 ‘가게’라는 말이 어울렸다. 가게에는 과자와 라면, 세제, 그리고 장갑과 모종삽이 함께 있었다. 재윤은 삼각김밥 대신 빵을 집어 들었고, 계산대 옆에서 우연히 까마귀 관련 상품 같은 걸 찾는 자신을 발견하고는 웃음이 나왔다. 당연히 그런 건 없었다.

가게 주인은 “어제 왔죠?”라고 말했다. 재윤이 놀라서 “네”라고 하자, 주인은 “요즘은 밖에서 본 사람보다 까마귀가 더 많아요”라고 덧붙였다. 농담처럼 말했지만, 웃음이 없었다. 주인은 재윤의 눈이 어디로 향하는지 알고 있었다. 계산대 너머 창밖에, 까마귀 한 마리가 서 있었다. 까마귀는 가게 앞 전봇대 아래에서, 마치 손님처럼 잠시 멈춰 서 있었다.

재윤은 밖으로 나와 까마귀를 가까이서 보았다. 까마귀는 까맣기만 한 새가 아니었다. 빛을 받으면 검은색이 아니라 아주 짙은 남색처럼 보였고, 목 쪽 깃털이 살짝 오일처럼 반짝였다. 눈은 생각보다 맑았다. 까마귀는 재윤을 한 번 쳐다보더니, 고개를 살짝 기울였다. 그 동작이 묘하게 인간적이었다.

재윤이 한 발 다가서자 까마귀는 툭, 두 발로 반대쪽으로 뛰었다. 날아가지 않았다. 도망가지도 않았다. 거리만 조절했다. 마치 ‘너는 저기까지’라고 선을 긋는 것처럼.

가까이서 바라본 새의 검은 깃털을 떠올리게 하는 랜덤 이미지

그날 오후, 재윤은 황등 주변을 걸어보기로 했다. 목적지는 없었다. 목적지가 없는 걷기야말로, 마음이 얇아졌을 때 할 수 있는 가장 좋은 일이라고 그는 믿었다. 도로 옆으로 난 작은 길로 들어가자 논이 더 가까웠다. 논 위에는 얼어붙은 물길이 가느다랗게 남아 있었고, 그 옆에서 까마귀들이 무언가를 쪼고 있었다.

재윤은 그들이 무엇을 먹는지 알 수 없었다. 곡식인지, 벌레인지, 아니면 그냥 흙인지. 하지만 확실한 건, 까마귀들이 ‘여기에서 살고 있다’는 사실이었다. 관광객처럼 들렀다 가는 새들이 아니라, 이 땅에 익숙한 주민들.

걷다 보니 하천 비슷한 곳이 나왔다. 물은 많지 않았지만, 둑 위로 나무가 줄지어 있었다. 그리고 그 나무들이 이상하게도 더 검었다. 가까이 가서 보니, 나무마다 까마귀가 빼곡하게 앉아 있었다. 수십, 수백. 재윤은 걸음을 멈췄다. 숨을 삼키는 소리조차 크게 들리는 것 같았다.

그때 나무 위에서 한 마리가 울었다. 바로 아래에 있던 재윤을 향해, 혹은 재윤의 뒤에 있는 무언가를 향해. 이어서 또 한 마리, 또 한 마리. 소리는 물결처럼 번졌다. 하지만 까마귀들은 날아오르지 않았다. 그저 앉아 있는 채로 울었다. 마치 회의 중인 사람들처럼.

재윤은 그 나무들을 바라보다가 갑자기 이상한 생각을 했다. ‘저 나무들이 까마귀를 지탱하는 게 아니라, 까마귀가 나무를 지탱하는 건 아닐까.’

그가 무서웠던 건 ‘까마귀가 많아서’가 아니었다. 까마귀가 많음에도 불구하고, 그들이 너무 질서정연해서였다.

면접 전날 밤, 재윤은 다시 잠을 설쳤다. 까마귀 소리 때문이라고 말하면 간단하지만, 사실은 그보다 더 복잡했다. 소리는 핑계가 될 뿐이고, 사람을 깨우는 건 늘 생각이었다. 그는 침대에서 몸을 뒤척이며 창문을 봤다. 커튼 사이로 어둠이 스며들어 있었고, 어둠 속에서 까마귀 소리가 간헐적으로 터졌다. 어제보다 덜했지만, 그래서 더 또렷했다.

그는 민박 주인이 말한 “낯선 사람은 처음엔 잠을 설쳐요”를 떠올렸다. 낯선 사람. 재윤은 그 말이 단지 황등에서 낯설다는 뜻인지, 아니면 재윤의 인생 전체가 낯설어진 걸 말하는 건지 헷갈렸다. 도시에서 살던 자신도, 지금 여기 누워 있는 자신도, 모두 ‘낯선 사람’ 같았다.

그날 밤, 재윤은 이상한 꿈을 꿨다. 꿈에서 그는 황등의 들판에 혼자 서 있었고, 하늘에는 까마귀가 떠 있었다. 까마귀는 날지 않았다. 떠 있었다. 마치 검은 별처럼. 그리고 한 마리가 내려오더니 그의 어깨에 앉았다. 무겁지 않았다. 오히려 따뜻했다. 까마귀가 그의 귀에 대고 무언가를 말했다. 재윤은 그 말을 알아듣지 못했지만, 알아들었다고 느꼈다. 알아들었다고 느끼는 순간이 가장 위험하다는 걸, 그는 꿈에서조차 알았다.

꿈에서 깼을 때, 그의 손은 베개를 꽉 쥐고 있었다. 손바닥에 땀이 배어 있었다. 그는 손을 펴고 숨을 고르며 스스로에게 말했다. ‘내일만 잘 넘기자.’

면접은 익산 시내에서 있었다. 민박에서 나와 버스를 타고 이동하는 길, 재윤은 창밖을 보지 않으려 했다. 까마귀를 보면 마음이 더 흔들릴 것 같았다. 하지만 사람은 보지 않으려 할수록 더 보게 된다. 시선은 결국 창밖으로 흘렀다.

그날 하늘은 유난히 맑았고, 그래서 까마귀는 더 선명했다. 까마귀 떼가 먼 곳에서부터 한꺼번에 움직이며, 마치 검은 천을 펼치는 것 같았다. 재윤은 갑자기 ‘저것들은 어디로 가는 걸까’가 아니라 ‘저것들은 어디에서 오는 걸까’를 생각했다. 오는 것과 가는 것. 그의 인생도 그 사이에 있었다.

면접장은 차가운 건물이었고, 내부는 따뜻했지만 그 따뜻함은 사람의 체온이 아니라 난방의 온도였다. 재윤은 자기소개를 했고, 질문에 답했고, 미소를 지으려 애썼다. 면접관들은 친절했지만, 친절의 표준을 지켰을 뿐이었다. “수고하셨습니다”라는 말이 나오자, 재윤은 머리를 숙이고 나왔다. 건물 밖으로 나왔을 때, 그는 숨이 더 잘 쉬어졌다.

그때, 건물 옥상 난간 위에 까마귀 한 마리가 앉아 있는 걸 봤다. 도시 한가운데의 까마귀. 황등에서 보던 까마귀와 같은데, 이상하게도 달라 보였다. 여기의 까마귀는 배경이 아니었다. 배경과 분리되어 있었다. 재윤은 까마귀를 바라보며 생각했다. ‘황등에서는 저들이 너무 많아서 무서웠는데, 여기서는 한 마리라서 더 무섭다.’

도시 건물과 하늘, 그 위에 앉은 새를 떠올리게 하는 랜덤 이미지

재윤은 다시 황등으로 돌아왔다. 돌아오는 길이 더 길게 느껴졌다. 끝나면 풀릴 줄 알았던 긴장이, 더 단단해져서 목에 걸려 있었다. 그는 민박에 도착해 방에 들어가자마자 신발도 제대로 벗지 않고 침대에 앉았다. 방 안은 정적이었고, 그 정적이 오히려 큰 소리처럼 들렸다.

해가 지기 시작했다. 그리고 소리가 시작됐다. 까마귀 소리. 어제보다 가까웠다. 마치 오늘의 재윤을 아는 것처럼. 그는 창문을 열고 밖을 내다봤다. 하늘은 주황빛에서 보랏빛으로 바뀌는 중이었다. 그 사이로 까마귀가 날아들었다. 한 마리, 또 한 마리, 또 한 마리. 방향이 같았다. 속도가 비슷했다. 저마다 다른 몸인데, 하나의 흐름이었다.

재윤은 그 흐름을 따라 시선을 움직였다. 그리고 깨달았다. 까마귀들은 지금 ‘모이고’ 있었다. 낮 동안 흩어져 있던 까마귀들이, 한 지점으로 돌아오고 있었다. 돌아온다는 건, 집이 있다는 뜻이었다. 재윤은 갑자기 마음 한구석이 서늘해졌다. 그는 스스로에게 집이 있는지 확신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그날 밤, 재윤은 충동적으로 밖으로 나갔다. 민박 주인의 말이 떠올랐지만, 그 말이 오히려 그를 밀어냈다. “밖에 오래 있지 마요.” 오래 있지 않으면 된다고 생각했다. 그는 코트를 걸치고 모자를 눌러쓰고, 바람 속으로 걸어 나갔다.

마을길은 어두웠지만 완전히 어둡지는 않았다. 가로등 몇 개가 길을 붙들고 있었고, 멀리 농가의 불빛이 점처럼 박혀 있었다. 그 점들 사이로 까마귀 소리가 흘렀다. 재윤은 소리가 나는 방향으로 걸었다. ‘모이는 곳’이 궁금했다. 그게 단지 새의 습성이라 해도, 그는 확인하고 싶었다. 확인은 사람의 가장 오래된 습관이었다. 모르는 걸 그냥 두는 건, 마음을 더 얇게 만들었다.

그가 도착한 곳은 하천 둑 근처의 큰 나무 줄이었다. 낮에 봤던 그 나무들. 밤이 되자 나무들은 더 높아 보였다. 그리고 나무 위는 더 검었다. 까마귀들이 잠자리를 잡은 모양이었다. 수천 마리의 몸이, 한꺼번에 나뭇가지에 기대어 있었다.

재윤은 숨을 죽이고 서 있었다. 까마귀들은 대부분 조용했다. 가끔 한 마리가 몸을 털면, 그 옆의 몇 마리가 함께 움직였다. 소리는 적었다. 하지만 ‘소리의 가능성’이 너무 많았다. 언제든 한꺼번에 울 수 있는, 그 가능성이 공기를 팽팽하게 만들었다.

재윤은 전신주 하나를 바라봤다. 전신주 위에도 까마귀가 있었다. 전선은 마치 계단처럼 까마귀들을 층층이 올려놓고 있었다. 그 계단의 꼭대기에는 가장 큰 까마귀가 앉아 있는 것 같았다. 그냥 그렇게 느껴졌다. 재윤은 그 까마귀와 눈이 마주쳤다고 생각했다. 물론 어둠 속에서 확신할 수는 없었다. 하지만 확신이 없을수록, 사람은 더 믿는다.

그는 그 순간, 자기가 관찰자가 아니라 관찰당하는 사람이라는 걸 알았다.

재윤은 무의식적으로 손을 들었다가, 다시 내렸다. 손을 들면 뭔가를 인사하는 것 같아서였다. 인사는 관계를 만든다. 그는 관계를 만들 준비가 되어 있지 않았다. 까마귀와도, 이 마을과도, 그리고 자신과도.

그가 돌아서려는 순간, 나무 위에서 한 마리가 울었다. ‘까악.’ 그리고 곧 이어서 다른 마리들이 받았다. 소리는 빠르게 커졌다. 재윤은 걸음을 멈추었다. 몸이 굳었다. 하지만 까마귀들은 날아오르지 않았다. 그저 울었다. 마치 “여기까지”라고 말하는 것처럼.

재윤은 그 말을 알아듣지 못했지만, 알아들었다고 느꼈다. 그는 천천히 뒤로 물러났다. 발밑의 자갈이 바스락거리자, 울음소리가 한층 더 날카로워졌다. 그는 숨을 들이마셨다가, 아주 조심스럽게 내쉬었다. 그리고 다시 민박 방향으로 돌아왔다.

재윤은 다음 날 아침 늦게 일어났다. 꿈을 꿨는지 기억나지 않았다. 기억나지 않는 게 오히려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그는 세수를 하고, 가방을 정리하고, 체크아웃 시간을 확인했다. 그리고 휴대폰을 들여다봤다. 부재중 전화는 없었다. 알림도 없었다. 어제의 면접이 마치 없었던 일처럼 조용했다.

민박 주인은 아침밥 대신 따뜻한 보리차를 내주었다. “잘 잤어요?”라는 질문은 있었지만, 대답을 깊게 듣고 싶어 하는 눈빛은 아니었다. 재윤은 “네, 뭐…”라고 말했다. 그 “뭐”에는 어젯밤의 둑길이 들어 있었지만, 꺼내면 길어질 이야기였다. 길어지는 이야기는 여기서 환영받지 못한다는 걸, 그는 어느새 배웠다.

재윤은 터미널로 가기 위해 짐을 들고 밖으로 나왔다. 바람이 어제보다 덜했다. 하늘은 여전히 맑았다. 그리고 까마귀는 여전히 많았다. 하지만 이상하게도, 그는 어제처럼 숨이 막히지 않았다. 그 이유를 바로 알 수는 없었다.

그가 길을 걷다가 문득 하늘을 올려다보는데, 까마귀 떼가 멀리서 또 한 번 움직였다. 검은 흐름이 하늘을 가로질렀다. 재윤은 그 흐름이 어쩐지 익숙하게 느껴졌다. 도시에서 사람들 사이를 헤집고 다니던 자신, 무리 속에서 방향을 잃던 자신, 그 모습과 닮아 있어서일까. 까마귀들은 함께 움직이면서도, 각자 날고 있었다. 한 마리의 날갯짓은 자기 몫이었다.

그때 전화가 울렸다. 모르는 번호였다. 재윤은 심장이 잠깐 빨라지는 걸 느끼며 통화 버튼을 눌렀다. “네, 여보세요.”

전화기 너머로 사람이 말했다. 어제 면접 본 곳이었다. 결과는 “합격”도 “불합격”도 아닌, 그 사이의 말이었다. “최종 검토 중이고, 다음 주에 다시 연락드리겠습니다.”

재윤은 “네, 알겠습니다”라고 말했다. 그리고 통화를 끊었다. 끊는 순간, 그의 어깨가 조금 내려앉았다. 내려앉았다는 게 나쁜 뜻만은 아니었다. 내려앉아야 땅을 딛는다. 그는 하늘을 다시 봤다. 까마귀가 전신주 위에 앉아 있었다. 몇 마리는 날아가고, 몇 마리는 남아 있었다.

재윤은 그제야 알았다. 황등의 까마귀가 두려웠던 건 ‘예고’ 때문이 아니라, ‘거울’ 같아서였다.

버스에 올라탄 재윤은 창가에 앉았다. 이번에는 창밖을 피하지 않았다. 그는 까마귀들을 봤다. 전신주 위, 나무 위, 논 위. 그들은 여전히 많았고, 여전히 검었고, 여전히 소리를 냈다. 그런데 재윤은 그 소리를 ‘위협’으로만 듣지 않았다. 그 소리는 그냥 그들의 언어였고, 그들의 일상이었다.

버스가 출발하자 황등의 풍경이 뒤로 밀려났다. 재윤은 마음속으로 황등에게 작별을 고하지 않았다. 작별은 끝을 만든다. 그는 끝을 만들고 싶지 않았다. 끝 대신 ‘잠깐의 멈춤’을 남기고 싶었다. 멈춤이란, 다시 돌아올 수 있다는 뜻이기도 하니까.

창밖에서 까마귀 떼가 또 한 번 움직였다. 이번에는 재윤이 그 흐름을 따라 고개를 돌리지 않았다. 그는 그냥 앞을 봤다. 앞에도 하늘이 있고, 앞에도 전신주가 있고, 앞에도 어딘가의 까마귀가 있을 거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삶은 늘 다른 곳에서 비슷한 방식으로 반복되었다. 그 반복 속에서 달라지는 건, 결국 사람의 눈이었다.

재윤은 잠깐 눈을 감았다. 까마귀 소리가 멀어졌다. 하지만 완전히 사라지지는 않았다. 귀에서가 아니라, 기억에서. 그는 그 기억이 싫지 않았다. 오히려 묘하게 단단한 느낌이 들었다. ‘저렇게 많은 것’도, 결국은 한 마리씩 모여서 만들어진다는 사실. 그 단순한 사실이, 그를 조금 숨 쉬게 했다.

버스는 시내로 들어갔고, 사람들의 얼굴이 다시 많아졌다. 재윤은 그 얼굴들 사이에서, 황등의 까마귀를 떠올렸다. 그리고 아주 작게 웃었다. 누가 보면 이유 없는 웃음이었다. 하지만 재윤은 알고 있었다. 이유 없는 웃음은 없다. 다만 이유를 설명할 필요가 없는 웃음이 있을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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